희뿌연 막걸리 자국이 남아있는 찌그러진 양은주전자, 칙칙거리며 구식 노래를 뱉어내던 덩치 큰 고물 라디오, 뜨거운 난로 위에서 거멓게 그을리고 이곳저곳이 우그러진 양철 도시락….
 지금 젊은 세대들은 '케케묵은 낡은 것들'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중년을 넘긴 '아저씨'들은 이런것들을 만나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먹을 것만 발견하면 눈이 '도록도록' 굴러갔던 배고팠던 어린시절. 까까머리에 '책보'를 메고 수십리 학교길을 오가던 그 추억의 시절이 털털거리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작가 구효서(43)가 내놓은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마음산책 刊)는 아련한 추억속에서 끄집어낸 이런 쓸쓸하고도 정다운 이야기들을 담은 책.
 '드르륵'하고 자바라식 문을 열었던 흑백 텔레비전, 조그만 손잡이를 뱅뱅 돌리면 안내원이 대답했던 새까만 자석식 전화기, 볼펜 껍데기에 끼워쓰던 손가락 두마디 만한 몽당연필들…. 사진작가 김홍희씨의 '낡은' 사진들과 함께 풀어내는 구효서의 옛 이야기는 독자들을 수십년전의 흑백세상으로 초대한다.
 작가는 '물동이'를 놓고 어릴적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조심조심 잰 발걸음을 놀리는 아낙. 조금만 흔들려도 물은 넘쳐 얼굴을 타고 가슴팍으로 흘러든다. 못된 사내가 쫓아와 젖가슴을 주물러도 속수무책이었던 물동이지만 몰래 죽그릇을 담아 친정에 보내곤 하던 가슴저린 사연도 숨어있다.
 40대가 넘어선 사람들 중에 '촌놈' 아닌 사람이 없겠지만 구효서는 강화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중에서도 '깡 촌놈'이다. 그와 그의 아들은 지금도 전화걸기를 귀찮아하는 '촌티'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풀어놓은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어느곳 하나 '깡촌' 아닌곳이 없었던 당시의 평등하고 정겨움 넘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꺼멓게 탄 뜨끈한 아랫목, 할아버지의 담배 고린내를 맡던 그 시절 그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224쪽. 값 7천5백원.
/朴商日기자·psi2514@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