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첫발을 디딘 곳이 호치민이다. 전쟁 전에는 이곳을 사이공이라고 불렀다. 인구 약 450만명이라고 하는 이 도시에 들어서면서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큼 흥청거리는 거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오토바이 물결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는데, 청소년들이며 직장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대중교통 수단인 듯한데, 호치민시에만도 약 200만대의 오토바이가 있다고 한다.
 오토바이가 많고 보니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 또한 대단하였고, 오토바이 폭주족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젊은이들이 소음을 내면서 질주를 하는데 어느 때는 수백대의 오토바이 폭주족이 떼를 지어 질주했다. 수백대의 오토바이 폭주족이 떼를 지어 질주하면 다른 오토바이 탄 사람들도 겁을 먹고 길옆으로 비켰다. 오토바이 폭주족이 떼를 지어 달리면 베트남 경찰에서는 그것을 막기 위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한다. 그러면 폭주족 선두에 달리는 리더는 그 정보를 휴대폰으로 보고 받으면서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이다. 교통 경찰대와 폭주족간의 추적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나중에는 거리를 완전히 막고 총을 겨누고 대기한다고 한다.
 호치민시는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통치를 받았다. 그 시대에 지어진 콜로니얼 건물과 교회가 있으며, 방사형으로 뻗은 거리는 아름다운 가로수로 가득하다. 거리의 간판은 화려하고 불빛은 현란하다. 베트남은 86년에 시장개방을 했지만 프랑스 식민지 때 자본주의를 경험했고 그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2차 대전 종식 후에 남부 베트남은 미국의 시장경제 속에 놓였다. 그러니 호치민시가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 못지 않게 흥청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호치민에서 이틀을 보낸 뒤 본래의 취재를 하기 위해 과거 전쟁이 있었던 쿠치 지역으로 향했다. 쿠치는 호치민에서 약 70㎞ 떨어진 밀림지역인데, 쿠치 중심시가지에서 약 30㎞ 떨어진 곳에 광대한 땅굴 지역이 있다. 베트콩의 지하 요새가 있었던 곳이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땅굴의 총 길이는 약 240㎞라고 하며 크게 3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굴은 2~3m 아래지만 그 밑에 또 하나의 은신처로 되어 있는 굴은 20~30m이고, 더 아래는 100m 땅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지상에서 그 굴을 파괴하기 위해 아무리 폭탄을 터뜨려도 지하 2층이나 3층 아래의 땅굴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땅굴 서로간에 연락망이 되어 있어 게릴라 부대간의 통로가 있고, 식당이 있으며 작전실이 있고 심지어 부상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있다. 땅굴 안에 샘도 만들어 식수를 공급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려면 나무에 불을 피워야 하는데 그 연기를 처리하는 것도 교묘하게 해놓았다. 이를테면 연기가 나가는 통로에 3중 필터를 장치해서 실제 연기가 지상으로 나갈 때는 거의 보이지 않게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공기 구멍을 따로 뚫어놓아서 미군이 땅굴에 가스를 주입하여 질식하게 하려는 것을 방비했고, 땅굴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서 잘 모르고 들어가면 폭파되거나 쇠꼬챙이에 찔려 죽었다. 무엇보다 굴 입구가 너무 좁아서 바짝 마른 베트남인이 아닌 덩치 큰 미군이나 한국군은 들어갈 수도 없었다.
 굴과 굴을 잇는 통로도 매우 좁아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 일부를 관광 상품으로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이 들어가 활동했다기 보다 두더지가 활동한 것이 아닌가 할만큼 협소하고 조밀하게 얽혀 있었다. 물론 통로가 아닌 공간으로 식당 작전실 그리고 숙소로 사용한 공간은 넓었다. 베트남의 전체 토양은 땅굴을 팔 수 없도록 되어있고 조금만 땅을 파도 물이 나온다. 그런데 쿠치만은 토양이 마사(磨砂)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땅굴이 가능했던 것이다.
 쿠치 부근에 미군 제25사단이 있었는데, 땅굴이 그 부대 안으로 뚫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25사단의 군량미라든지 무기가 자주 도난당하고 없어졌는데, 그것은 부대 땅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미군에서는 이 사실을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베트콩 사령부에서는 전쟁이 빨리 종식이 되지 않고 더 지연될 경우 그 땅굴을 70㎞ 떨어져 있는 사이공까지 뚫으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그 땅굴은 모두 호미와 소쿠리로 하는 수작업이었다. 거기서 나온 흙은 부근에 흐르는 메콩강에 흘려보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전쟁이 종식된 이후 70년대 중반에 북한의 김일성이 쿠치를 방문하여 땅굴을 보고는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했다고 한다. 아마 휴전선 부근에 땅굴이 많은 것도 여기서 배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휴전선 땅굴이 어디까지 어떻게 뚫려 있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일이다. <글:정현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