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침략을 아시아민족 해방으로 왜곡한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사건'이 다시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일제치하 경기도 종교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한 책이 나왔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회장·서굉일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를 주축으로 한 12명의 학자들이 필진으로 참가한 '일제하 경기도 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경기문화재단刊)은 유교·불교 등 전통 종교, 서양종교인 천주교·개신교,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한 천도교·대종교 등 민족종교 그리고 도탄에 빠진 기층민이 기댔던 민중종교와 민속신앙을 12장을 구분해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주요 필자인 서 교수는 “1910년 한일합방 뒤 정신적 공허를 메워준 것이 다양한 종교”였다며 “각 종교는 개화자강운동, 구국교육운동, 계몽운동, 사회문화운동을 신앙적 실천운동과 병행해 나가면서 국난극복에 헌신했다”고 밝혔다. 또 경기지역 종교운동의 특색으로는 진보·실리·실천을 꼽고 “낙후한 전근대적 양상의 종교는 발전하지 못한 반면, 개화를 지향한 근대적 성격의 그리스도교·천도교는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한다.
▲한국재림교회(안식일교회)가평적목리 신앙공동체(이종근 삼육대교수)=식민통치가 시작될 무렵, 손흥조가 처음 받아들여 임기반 등이 포교한 이 교파는 1943년 해산당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깊은 산중인 가평 적목리에 신앙공동체를 형성, 1945년 해방까지 자급자족하면서 신앙의 양심과 민족정기를 지켰다. 이 공동체는 일체의 친일을 원천차단했음은 물론 철두철미 우리말과 우리글을 교육시켜 이 곳을 근거지로 해 전국순회 계몽운동을 벌였다.
▲유교(오영섭 한림대강사)=한일합방 이후 재래서당과 새로운 개량서당으로 나뉘었다. 전통유림이 운영하는 재래서당은 한문·유교경전을 가르쳤지만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개량서당은 국어·국사·산수·세계사·세계인문지리 등을 가르쳤다. 1912년부터 1938년까지 보면 서당 수는 1천813개에서 378개로 줄었다. 여성이 이 시기에 59명에서 363명으로 증가한 것은 괄목할 만하다.
▲불교(한동민 중앙대강사)=1911년 사찰령으로 경기지역은 봉은사·봉선사·전등사·용주사의 4본산 체제로 바뀌었다. 본산 주지들이 친일성향을 갖고 있었음을 부인키 어려우나 포교당과 명진학교라는 새로운 기관을 통해 각성된 젊은 승려를 배출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을 도와 만세운동을 벌인 용주사 승려 신상완(1891~1951)이 그 예다. 또 수원포교당은 1920년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11년 10월 신풍동에 설립된 뒤 1920년 남수동으로 이전된 것이다.
▲민중종교(박환 수원대교수)=경기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백백교·청림교·인천교·대화교·보천교·정도교·인도교를 들 수 있다. 경기도에 본부를 뒀던 것은 백백교·선도교·단군교·문화연구회·교정회·불교극락회·원융도·동천교 등이다. 경기지역은 민중종교 세가 약했으나 이들 역시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국이 독립될 날을 갈구했으며 거금을 의연하기도 했다. 기복성향이 짙은 가운데 민중의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으며 후천사회(도덕적 이상사회)를 갈구하는 사회개혁적 의지도 보여준다. /柳周善기자·jsun@kyeongin.com
각 종교 일제때 국난극복에 헌신
입력 2001-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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