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년 12월, 후백제의 견훤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로 진격해올 때 신라 경애왕(景哀王)은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즐겼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인해 포석정은 국정을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빠진 방탕한 왕실로 인해 신라가 멸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돼 있다.
오는 31일 오후 8시에 방송될 KBS 1TV '역사스페셜-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이러한 포석정에 관한 일반의 인식에 대해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12월이면 야외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기에는 너무 춥다는 점 ▲아무리 국정에 무관심한 왕이었을지라도 적군이 25㎞ 앞에 있는데 연회를 즐길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 ▲포석정이 위치한 경주 남산은 신라의 4대 성지로서 대신들이 큰 일을 논의하던 곳이라는 점 등이 그것.
제작진은 이러한 의문점들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으로 포석정의 실체에 다가간다.
먼저 경애왕이 포석정을 찾았던 12월은 호국적인 성격의 불교의식인 팔관회가 열리던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경애왕은 적의 침범을 막아주기를 기원하는 팔관회 즉 호국제사를 포석정에서 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포석정을 왕들의 놀이터로 해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현존하는 유상곡수(流觴曲水)터 때문. 유상곡수는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로 알려졌다. 그러나 유상곡수가 비롯된 중국의 기록을 보면 유상곡수가 계사라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사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 부정을 없애는 의식으로 유상곡수와 함께 이뤄졌다는 것. 유상곡수는 단순한 유희가 아닌 성스러운 의식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주변이 모두 성지로 둘러싸인 포석정은 그 위치로 볼 때 왕들의 놀이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는 포석정이 포석사 및 사당으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게다가 지난 98년 문화재연구소는 이 지역에서 '포석'이라고 쓰인 명문기와와 궁궐이나 대규모 절에 쓰이는 와당류 등의 유물을 다수 출토해 포석정이 사당과 절, 제단 등 호국제사와 국가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중요시설이 있던 성지였을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정수PD는 “포석정이 왕들의 놀이터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라멸망과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포석정주변의 유물들에 대한 발굴이 좀 더 이뤄진다면 그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KBS '역사스페셜' 포석정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의문 제기
입력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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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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