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시 청계산(淸溪山)의 조선 지명은 광주군 청룡산(靑龍山)이다. 푸른 용이 산허리를 뚫고 나와 흰구름을 헤치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든 산이다. 그 청룡의 가슴에 청계사(淸溪寺)가 고즈넉하게 안겨있다.
 '봉은본말지'에 따르면 청계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한때는 선종의 본산으로 100여명의 스님들이 불도를 닦던 대가람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발자취가 허전할 뿐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경허스님이 입산 출가한 사찰로 선종의 맥을 최근까지 이어온 명찰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은 지난 55년 이후 중수된 것으로 사찰내에는 극락보전과 아미타여래좌상, 동종, 사사적기비(寺事蹟記碑)와 산신각, 삼신각, 감로지 등 적지않은 문화유산이 비장돼있다.
 사찰입구 주차장 한켠에는 청계사의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너비 62㎝, 높이 168㎝의 사적비 5기가 있는데 이중 하나는 오랜 세월동안의 풍우에 씻겨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은 물론 비석의 모습까지 변형된 상태다. 다른 하나도 역시 비문이 있기는 하나 숭정기원후기사(崇禎紀元後己巳, 1689년) 6월이라는 글자만 뚜렷할 뿐 나머지는 정확히 판독할 수 없고 그외 것은 최근에 건립한 것으로 청계사의 정확한 창건연대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사찰내에 들어서면 대각국사 의천이 건립했다는 극락보전이 단아한 모습을 자랑한다. 고려때 창건한 건축물이라고는 하나 오랫동안의 세월속에서 수없이 중수되어 현재의 상태는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그 규모는 정간(正間)이 3간(30평)에 익공양식(翼工樣式)이고 겹처마에 8작지붕으로 전면에 4짝의 분합문이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되어 청계사의 주존불로 봉안된 아미타여래좌상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자비로운 미소로 세속의 번뇌를 씻어주고 있다. 특히 관음보살상은 지난해 10월 3천년에 한번 모습을 보인다는 상서로운 꽃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모두 원래는 목불이었으나 금동을 덧씌어 금동불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극락보전 옆에는 아담한 종각이 있고 그 안에는 종체에 銘文이 '강희 40년 신사4월 일주성'과 '광주 청룡산 청계사 대종 700근'이라고 뚜렷이 각자된 동종이 안치돼있다. 경기도유형문화재 96호인 동종은 조선 숙종 27년(170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용유는 쌍룡(雙龍)이고 상대에 화문(꽃무늬), 하대에 보상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9개의 유두가 있으며 그 사이에 보살입상이 정묘히 조각되어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높이 110㎝, 구경 76.5㎝, 상경 42㎝, 하부두께 7㎝인 이 동종은 태평양 전쟁시 일제의 무차별 공출로 운명을 다할 뻔 했으나 다행히 서울 봉은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전되다가 지난 75년에 제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청계사도 대다수 명찰이 그렇듯이 한시대를 풍미한 기인재사들의 향기로운 사연들로 더욱 빛난다. 고려말 충신이었던 이색 조윤 길재 등은 고려의 신하였던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자 조선조에 협조를 거부하고 닭소리와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을 헤매다가 이 곳 청계산 청계사에서 자리를 잡고 주역을 읽으며 나라 빼앗긴 원통함을 달랬단다.
 특히 조윤은 호조판서의 높은 벼슬까지 뿌리치고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함은 개와 같다면서 이름까지 견(犬)으로 바꾸고 청계산에 올라가 옛 왕조의 도성인 송도를 보고 울다울다 지쳐 쓰러졌다고 하며 이후부터 사람들은 청계산 정상의 이름을 모든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만경대(萬景臺)에서 망경대(望景臺)로 고쳐 불렀다 한다.
 요사이 청계사에 이르는 청계산 4㎞ 계곡길은 확포장 공사로 난장이다. 의왕시가 시비와 도비를 들여 '청계산 자연발생유원지'를 조성하고 있는 탓이다. 여름이면 시원한 청계산 자락에 몰려드는 행락객들의 진입을 돕기 위해 주차장까지 마련중이다. 승용차들도 서로 교행이 안됐던 산골 외길이 넓어지면서 천년고찰 청계사는 '자연발생 유원지'의 엉뚱한 풍경으로 남게된 것이다. 절을 절답게 간직할수 없는 수도권의 절박한 집중현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나 다부지게 마음 먹으면 선승과 은자들이 빚어낸 천년향을 맡을 수 있는 곳이 청계사다. /윤인수기자·isyo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