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성역의궤중 회화성이 풍부한 도설로 꼽히는 '영화역도(迎華驛圖)'.
 풍부한 회화성을 지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설(圖說)은 지
금까지 추정된 대로 엄치욱(嚴致郁)이라는 단일 인물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공동작업했으며 엄치욱은 오히려 보조 역할자였을 가능
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홍익대 예술학과 박정혜(겸임)교수는 지난 24일 진단학회·경기문화재단
주최로 수원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열린 '화성성역의궤' 간행 2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의궤청 좌목에 화사의 직책으로 엄치욱이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어 그가 도설의 그림을 그린 화원으로 추정돼 왔으나 건물 표현이
나 수지법, 인물 표현에서 두 사람 이상의 필치가 엿보인다”며 “여러 사
람의 공동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엄치욱의 참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혼자 그 많은 도
설의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면서 같은 시기의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제작
과 비교해 주장을 전개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원행…'는 김홍도가 감독
관 자격으로 화원을 지휘했고 실제로 화본을 그린 화원은 최득현 김득신 이
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연 이인문 등 7명의 차비대령화원으로 추정되는데,
정조가 국가적 중대 역사(役事)의 기록인 화성성역의궤의 도설을 엄치욱
한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은 의미에 걸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볼때 '화성…'의 도설은 국가의 중요 회사(繪事)에 우선 차정됐
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들이 주도적으로 제작하고 엄치욱은 보조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엄치욱에 대한 조사 결과, 도화
서 화원이 아니라 서울에서 관청을 중심으로 직업화가로 일하던 방외화사
(方外畵師)임이 분명하며 김홍도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던 화가였다고 밝혔
다.
 이날 첫 발표에서 최홍규 교수는 화성성역의궤의 역사적 의의를 ▲성역
의 계획·운영을 알려주는 각종 문헌과 참여 주관 관료와 실무 책임자 등
축성 전모와 시말을 각 항목별로 세밀하게 부각시킨 점 ▲왕권강화 의지와
문운 융성의 실상이 담긴 역사 문헌이라는 점 ▲ 정교한 금속활자와 높은
수준의 인쇄술이 반영된 귀중한 문헌이라는 점 ▲순수한 한문체와 이두식
한자표기가 혼용돼 18세기 말 국어사 연구의 자료라는 점 ▲종합적인 건설
보고서로서 신기원을 이뤘다는 점 등 5가지로 압축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최홍규(경기대), 노영구(서울대), 조병로(경기대),
김동욱(경기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으며 토론에는 정만조(국민대) 김문식
(서울대 규장각) 서태원(동국대) 윤용출(부산대) 정병모(경주대) 이왕기(목
원대) 교수가 토론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