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원군(元君)이 자기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고 화공을 모았다. 많은 화공이 몰려들었다. 화공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을 핥기도 하고 먹을 갈면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뒤늦게 도착한 한 화공은 지시를 받자마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원군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다. 그 화공은 두다리를 뻗고 벌거벗고 있었다. 원군이 이를 전해듣고 말했다. “됐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화공이다.”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나오는 유명한 얘기다. 어느 중국학자는 이 이야기를 중국 예술의 이상이자 정수라고 했다던가. 어떠한 인습에도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벌거벗은 화가! 사물을 모사하는 환쟁이를 넘어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는 진정한 예술가를 우리는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박영택교수(경기대)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떠오른 것은 문외한의 어줍잖은 관념 탓일까.
 고백하거니와 나는 미술을 모른다. 그림도 모른다. 다만 인류의 숭고한 유산인 미술사에 대해 지적, 미학적 서툰 '밀렵'을 간간이 시도해 보는 게 고작이다. 느닷없이 서점에 미술서적이 넘쳐나는 이유를 어깨너머 알고싶은 어리숙한 '초심자'라고나 할까. 행여 우리의 눈을 열어준 '미적 천재'들의 위대한 성취들을 이 '문화적 수탈'의 시대가 너무 쉽게 베껴먹고 착취하는 것은 아닐까 하릴없이 고민하는 얼치기 '애호가'쯤 될까.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그러므로 나에겐 위안이자 희망이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 생활 10년에 여기 담은 10명의 예술가 말고도 소개하지 못한 예술가가 많아 미안하다는 저자의 변명은 사실 눈물나도록 반갑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절대고독을 감내하며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최소한 10명이 넘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주 산골의 오막살이에서 몇날며칠밤 화폭을 문지르는 김근태. 경기도 광주의 작업실에서 '피'의 의미를 처절하게 파고드는 김을. 생사를 건 조각배의 갑판에서 살아있는 바다를 화폭에 퍼담는 청도. 날렵하고 단순한 선만으로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조각가 박정애. 황토의 질감과 양감으로 사라져가는 한국의 미학에 매달리는 박문종. 한국적 무의식의 환상에 매달리는 염성순. 최소한의 목수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서럽고 슬픈 추억을 천착하는 정일랑. 죽음과 면벽하며 숲과 인간의 진실을 파고드는 김명숙. 응축된 우리의 시간을 단순한 소도구와 소똥으로 잡아내는 최옥영. 침식되는 조국의 산하를 명상보행으로 잡아내는 사진작가 정동석.
 미안하게도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읽기 전엔 단 한 번도 이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나. 그러나 이들의 삶과 예술을 전하는 책갈피(사진·김홍희)는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베어버린다'. 이들은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수도승들인가. 아니다. 정형화된 화단의 문법을 거부하며 괴벽을 추구하는 딜레탕트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의 작업에 작위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단호히 손사래를 치면서 조용히 '예술정신'을 추구하는 숨은 장인들일 뿐이다. '두다리 뻗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박영택의 문장 또한 시리도록 맑다. 2001년 이 책을 만난 건 어쩌면 큰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