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미술의 산 증인으로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없는 그는 여든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고 있었다.
지난 12일 낮 12시. 그가 머물고 있는 서울 상계 백병원 1217호실을 찾았다. 병실 문은 열려 있었는데 벽면엔 온통 표구하지 않은 그림이 나붙어 있었고, 보호자용 간이 침대는 붓과 먹 등 화구와 낙관을 찍지 않은 작품 몇 점이 차지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백발에 병색이 완연한 노신사는 지팡이에 턱을 괸 채 창밖의 먼 산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경인일보 기자라고 소개하자 타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만큼 고향 인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탓일 게다. 이 때문인지 그는 자신이 쓴 20여권의 책마다 소개한 이력의 첫 페이지에 '인천 출생'을 빼먹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병세가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변변한 거처가 없어 잠시 이 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며칠 뒤면 서울 평창동의 한 노인전문요양시설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가 평생을 함께해 온 미술과 인연을 맺은 건 '우연'이었다. 1919년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19세 되던 해에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다. 그러나 마중나오기로 한 친구 대신 그 곳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인천 출신 친구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지만 그의 생각은 늘 미술에 가 있었다.
“인생은 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이에요. 팔십을 넘긴 지금 돌이켜보면 미술과의 인연은 그야말로 우연이었습니다. 그 우연이 당시만 해도 희귀했던 미술사학을 전공하게 했고, 귀국 후엔 또 우연한 기회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미술과 함께하게 된 겁니다. 미술비평가, 미술관장, 미술대학 교수, 아마추어 화가 등 미술이란 단어를 빼고는 나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가 됐어요.”
1942년 두 번째 일본 유학시절 와세다대학 미술사학과 아이쓰 야이치 교수가 건네 준 격려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60년이 넘었는데도 그 때 들었던 '너희 나라 미술사는 일본인에 의해 연구돼 잘못 해석된 것도 많다. 너 같은 조선 청년들이 직접 조선의 미술을 연구해라'는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결국 그 말이 내 인생을 결정지은 꼴이 됐습니다.”
전쟁 통에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된다. 5개월 남짓 준비한 끝에 당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있던 향토관 건물(독일인이 지은 세창양행 사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이듬해 4월1일 문을 열었다.
큐레이터는 물론 예산 한 푼 없었다. 소장품도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이 곳 저 곳을 쫓아다니며 문화재를 수집했다. 본국으로 물러가는 일본인의 물건을 압수해 놓은 세관창고와 일본군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 각지에서 철물을 끌어다 모은 인천 부평 조병창 등이 주 대상이었다.
“부평 조병창에 갔는데 중국 원나라와 청나라 때의 종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것들을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당시 웃지못할 일도 하나 소개해줬다.
강화 전등사 주지스님이 일본인들에게 빼앗긴 사찰 종을 찾기 위해 조병창에 왔는데 원래 종은 오간데 없고 중국의 종만 있어 어쩔 수 없이 중국 종을 전등사 종이라고 우겨 찾아갔다는 얘기였다.
석남은 인천시립박물관 이외에도 홍익대와 이화여대 박물관 등을 새로 개관하고 초대 관장으로 취임하는 등 유난히 박물관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1947년엔 우리 나라 최초의 아트센터라고 할 만한 '인천시립예술관'을 만들어 운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그의 덕에 인천은 당시만 해도 전국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그는 굳이 자신을 '아마추어 화가'라고 말하지만 열 번이 넘는 개인전을 열 만큼 그림그리기에도 남다른 면이 있다. 그의 작품 소재는 주로 '사람'이다. 왜 '사람'만을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냥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을 그림 주제로 삼았을 뿐”이라고 했다.
사람을 그려내다 보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 같아 텅빈 마음이 조금이나마 메워진다고도 했다.
그런 그의 작품 소재가 요즘엔 '산'으로 바뀌었다. 12층 병실 밖으로 볼 수 있는 게 도봉산과 북한산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도에 이처럼 아름다운 산(山)을 갖고 있는 곳은 서울밖에 없어요. 이 아름다움을 아파트와 관통도로가 다 버려 놓고는 있지만….” 이 곳에 온 지 두 달이 채 안 됐지만 그는 산 그림을 100점이나 넘게 그렸다. 이 것으로 전시회를 가질 생각이란다.
몸이 성치 않은 석남은 요즘 마음도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