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음악가인가 아니면 왜색음악을 전파한 친일음악가인가?'
 
화성시 남양동(당시 행정구역상으론 수원)이 고향인 한국근대음악의 선구자 난파 홍영후(1898~1941) 선생이 지난해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명의 한 사람으로 발표되면서 지역 음악계는 물론 화성시에서도 난파 관련 기념사업에 대한 찬반의견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난파의 친일행적이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음악적 업적까지 사장해선 안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홍난파는 친일파일뿐 아니라 작곡기법과 정서 등 음악적 내용까지 모두 일본적인 음악가였다는 주장이 팽팽히 대립돼 있다.

홍난파는 수원지역이 음악도시로 발전하는 데 명분과 기반이 돼왔다. 수원합창의 효시인 난파합창단이 올해 창단 38주년이며 경기음악협회 주최 난파음악제는 35회, 난파기념사업회 수여 난파음악상은 36회를 맞고 있다. 하지만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활초리(옛지명) 생가 정비사업과 기념관·노래비 건립 등은 난항을 겪고 있다.

경기음악협회(회장·오현규)가 4월 10일 홍난파 탄생일을 앞두고 '난파 홍영후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오는 28일 오후 2시 경기도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 홍난파에 대한 현재의 시각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에 나선다.

이날 발제자는 난파의 친일행적을 처음 발표한 노동은 중앙대 교수와 음악평론가 이상만씨, 토론자는 탁계석(음악평론가) 정희준(화성시민회장) 김영기(경기민예총 회장) 김철민(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씨다. 지역음악계에서는 홍난파의 공과(功過)를 치열하게 토론할 이번 행사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심포지엄에 앞서 홍난파의 친일행적과 상반되는 논점을 알아본다.

◆친일행적=노동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홍난파는 1937년부터 친일음악활동이 두드러진다. 이 해 조선총독부·조선문예회 주최 '시국가요발표회'에 최남선의 가사에 곡을 붙인 '정의의 개가' 발표, 부민관 위문공연에서 '장성의 파수'(최남선 사) '공군의 노래'(彩本長夫 사) 등 친일가요를 발표하고 음악보국대 연주회에 출연했다.

1938년에는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에 가입하고, 1940년에는 '지나사변과 음악' 등의 글과 음악을 통해 친일활동을 하며 모리카와 준(森川潤)이라는 창씨개명을 사용한다.

노 교수는 이에 더해 홍난파의 작곡기법이 애상적인 미야코부시 음계(요나누키 음계, 도·레·미·솔·라로 구성)와 일본음악의 특징인 2박자에 철저히 기반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활동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에 상응,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 자기도피와 자기기만의 음악운동”이라고 밝혔다.

◆다른 입장들=홍난파는 1937년 흥사단과 관련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3개월간 수감된다. 이때 늑막염이 생겨 결국은 이 병의 재발로 4년 뒤 타계한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나중 일제가 전원 무죄판결을 하지만 병의 발생과 수감 경험은 친일의 정황이 될 수 있으며 홍난파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잃는 것이 많다는 주장이다. 홍난파는 또 1931년부터 시작된 민족적 내용의 천도교 천덕송을 의뢰받아 작곡해주기도 했다.

작곡가 나운영씨는 '홍난파 선생 예찬'이라는 수필을 통해 홍난파를 옹호하고 있다. 1940년 1월 홍난파가 그에게 “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하며 민족음악을 창조함으로써 손기정 선수처럼 비록 나라는 빼앗겼어도 민족의 이름을 온세계에 빛내라”고 당부한 것으로 기록했다.

윤이상 역시 1954년 추도회에서 “신한국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공로는 선생에게 있을 것”이라며 “특히 '동요 100곡집'은 전곡이 주옥같으며 민족정서와 일제에 반항하는 애수가 들어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