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세워져 그모습 그대로 간직한 행주성당.
서울 명동성당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인 행주성당.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의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행주성당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알고 있는 일반인은 극히 드물다.

명동성당이나 유럽의 으리으리한 성당 건물을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채롭게 보일지 모른다.

행주대교를 건너 능곡으로 가는 길목 어귀에서 오른쪽 작은 길로 빠진 후 다소 위태로운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넓은 마당과 독특한 외양을 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기와를 얹은 붉은 벽돌의 옛스러움이 얼핏 고시원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19세기 말 지어진 유서깊은 행주성당이다.

명동성당이나 유럽의 으리으리한 성당 건물을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채롭게 보일지 모른다.



△행주성당이 걸어온 길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94에 성당이 세워진 때는 1910년. 당시 행주나루는 매우 번잡한 교역지였다. 밀물과 썰물의 영향으로 마포나루 등 상류쪽 나루의 선박 출입이 제한적이었던 반면 행주나루는 항상 선박의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관청너머'라는 음식점 이름이 남아있을 정도로 교역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이 여러 개 설치됐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냈던 행주성당은 45년 해방과 함께 폭발적인 교세확장으로 경기 서부지역 천주교 산실이 됐다.
그러나 이도 잠시 한국전쟁 통에 지붕을 비롯한 건물 일부가 소실되는 전화를 입은데다 마을 주민까지 서울 등지로 대거 이주하면서 1957년 본당을 수색으로 이전하고 행주 성당은 공소로 전락했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던 행주성당은 1991년 두봉 주교가 부임해 오면서 전쟁 중 소실된 곳들을 보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 수준의 역사성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94에 위치한 행주성당은 개화기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의 역사적 증거물로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한번쯤 들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행주성당은 1949년 확장공사로 인해 원래의 기둥을 양쪽으로 나누었지만 건립 당시 방을 나누기 위해 가운데 두었던 기둥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신자들은 엄격한 남녀 동석 금지원칙에 따라 미사를 올리더라도 남녀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운데에 칸막이를 설치했으며 출입문까지도 따로 두었다.

남녀 구분용(?) 기둥을 따라 천장을 올려다 보면 가로지르는 2개의 들보를 볼 수 있다.

'天主降生 一千九百十年四月十七日 入住上梁' '륭희사년 경술삼월팔일 셩요셉은 보쥬일 립쥬상량'.

들보에는 한자로 1910년 4월17일 상량식을 했다는 글귀와 상량일이 순종황제 연호로 따져 융희4년 음력 3월8일이었음을 나타내주는 한글이 함께 기록돼 있다.

100년 남짓한 세월을 건너 조상들이 새긴 글귀를 보는 감회도 남다르다. 더욱이 그 들보와 기둥, 천장의 서까래로 쓰인 목재는 전통적인 한국의 곡선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목재소에서 반듯하게 가공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의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다.

또 벽을 둘러싸고 있는 연작 성화(聖畵)인 '십자가의 길'은 명동성당 개축 당시 새로운 그림을 걸면서 이전 걸려있던 그림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란다. 건축미학과 종교적, 역사적 가치에 대해 눈여겨볼만 하다.


△행주성당의 오늘

행주성당은 100년 전의 모습에 머물러 있지않고 지금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마을 주민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신자들이 매일 아침 20~30명씩 미사에 참석하는가 하면 주일이면 100여명까지 모인다. 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미사와 관계없이 지나다 들르는 곳이 행주성당이다.

고즈넉한 가을 한강의 낙조를 바라보는 경치 또한 일품으로 바쁜 일상사에 지친 도시민들이 훌훌털고 한번쯤 들러봄직하다. (031-974-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