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와 화성(華城·화성시)의 인연은 뗄려야 뗄 수가 없다. 1789년(정조13)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능묘를 당시 수원부 화산 아래의 수원읍치로 옮기고, 현륭원(현재 융·건릉)을 조성한다. 이 때부터 정조와 화성의 연은 시작된다. 특히 정조는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고, 그 곳에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축성하면서 신읍치를 수원(水原)으로, 화성 성곽 밖을 '화성(華城)'으로 명명하면서 화성의 역사는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정조와 화성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조가 화성에서 무슨 일을 했다”며 정조를 중심으로 화성의 역사·문화·사람들을 엿보려고 하지, 화성사람들의 시각에서 정조를 바라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정조가 화성과 연을 맺기 이전부터 화성지역과 화성사람들은 존속돼 왔는데도 말이다.
 
26일부터 오는 12월5일까지 경기문화재단 2층 전시실(031-231-7228)에서 열리는 '화성사람들, 정조를 만나다'展은 화성사람들의 시각에서 정조를 바라본 전시다.
 
화성문화원과 화성시사편찬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차례에 걸쳐 화성지역 고문헌 조사를 실시하면서 얻은 성과물 가운데 화성지역을 대표하는 네 개 집안의 고문헌을 통해 화성사람들이 정조와의 만남으로 어떠한 삶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문신집안인 매송면 야목리의 풍양(들목) 조씨, 무신집안인 우정면의 해풍 김씨, 공신인 정남면 괘랑2리의 연안 차씨, 실학자인 매송면 어천리의 단양 우씨 등의 집안이 보관해 오던 고문서 67점이다.
 
풍양 조씨의 경우 야목리를 세거지로 택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정조다. 정조가 수원의 신읍치에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 과거를 실시하고, 신읍치의 선비들만 응시하게 하는 정책을 펴자 서울에 살던 들목 조씨들이 지체없이 이 곳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들목 조씨는 이 같은 능동적인 행보로 인해 이후 중앙무대로 진출하면서 부흥기를 누렸다.
 
무신집안인 해풍 김씨도 정조와의 만남을 통해 그 위상을 드높이게 된다. 해풍 김씨는 화성을 쌓는데 감독관으로 동원됐고, 이후 정조가 화성에 장용외영을 설치하면서 해풍 김씨들이 대거 이 곳에 배속됨으로써 정조의 수족이 될 수 있었고, 가문도 번성할 수 있었다.
 
또 남산 밑의 연안 차씨들도 정조가 고개너머에 현륭원을 조성하고, 차도항을 현륭원의 어진봉안각 위장으로 임명했기에 정2품 실직에 오르는 도약을 하게 된다.
 
이 밖에 실학자 우하영도 정조가 전국의 선비들에게 시무책을 구했을 때 그에 대한 상소를 한 것이 인연이 돼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전시도록은 이 같은 내용들을 총망라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있어 전시기간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도 이 도록을 통해 정조와 화성사람들의 인연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031)353-6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