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미술계는 미래 한국미술사의 오명으로 남을 기록과 놀라운 진기록, 그리고 미술학으로서의 '미술’이 갖는 명예로운 일이 있었다. 오명의 핵심은 이중섭과 박수근의 위작 논란이다. 진기록은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이 한국과 미국의 최대 경매회사에서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그 진가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두 인물(이중섭과 박수근)은 왜곡된 근대미학이 만들어 낸 불운한 시대의 천재였다. 한국전쟁과 1960년대 근대국가 개발 논리에서 타고난 재능과 열정으로 보여주었던 작품들이, 이후 그들이 살았던 힘겨운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 '국민작가’라는 네임벨류의 가치로 보상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재능과 힘겨운 삶, 그리고 요절이라는 낭만적 현상이 만들어낸 근대적 천재관의 일그러진 초상임을. 뿐만 아니라 급속히 팽창한 자본주의 전략이 그러한 천재관의 대중적 호응과 언론 플레이를 이용해 작품을 상류층의 한낱 투자가치로 전락하게 하지 않았던가.
프랑스의 근대 미학자 베롱은 진정한 천재란 개성과 인격성의 발현에 있다고 했다. 짧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놀라운 개성과 인격성을 보여준 천재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물다. 특히 동북아시아 전통에서 개성과 인격성의 발현은 오랜 시간의 숙련과 자아의 깨우침, 즉 역경을 견디고 그 분야의 독자적 경지를 이룩했을 때 불려진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절차탁마'(切磋琢磨)라 하지 않았던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우봉 조희룡과 같은 조선의 화가들이 모두 그랬다.
현역작가 전혁림의 올해 나이는 구십이다. 191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열일곱에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스물 두 살 되던 해 부산미술전에 '신화적 해변' '월광' 등을 출품해 입선하며 화단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이 되자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했고, 한국전쟁중 부산으로 잠시 거처를 옮겨 작품 활동을 했다. 이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동년배 작가들은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귀천하거나 화업에서 손을 놓았다. 시대의 변화가 폭풍처럼 휘몰아 친 현대사의 소용돌이에서도 그는 묵묵히 고향 통영을 지키며 작품을 제작했다.
2002년. 그의 나이 여든일곱.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를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다. '중앙’주의 화단에서 지역을 고집하며 자신의 독자한 색채와 풍경을 이룩한 이 노대가의 전시는 황홀했다. 이미 붓을 놓아도 한참은 되었을 법한 나이에 '최근작'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3년이 지난 올해. 일천호가 넘는 대작(大作) 두 점과 320개의 소반에 그린 '새 만다라'를 비롯해 90여점의 작품이 용인 이영미술관을 가득 채웠다. 모두 '2005년 작(作)’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으면 자꾸 잡념이 들어서 싫어요. 잡념이 뭐냐고? 죽음이지요. 죽을 때 죽는다는 공포 없이 편안하게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에 작품에 전념을 해버려요”라고 말한다.
전혁림은 미술학의 '미술’이 갖는 품격과 명예가 무엇인지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준다. 더불어서 가난과 요절에 점철된 근대 예술가의 천재론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일깨워준다. 그는, 다만 '살아 남아서’가 아닌 죽음의 공포와 삶의 사변적 잡념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작품의 진경으로 들어가 그 푸른 통영의 색과 뛰놀 뿐이다. 하늘과 바다, 섬, 산, 배, 부둣가, 옹기종기 들어앉은 집과 길이 상상의 텃밭이요, 삶이요, 미술의 힘이다. 우리 안에 풍부히 내재된 전통적 민중미학의 힘줄이 구십 전혁림의 정신과 팔뚝에서, 통영의 작업실 곳곳에서 물결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시대, 세태 흐름과 자신의 미학을 맞바꾸고, 형식을 만들어 매너리즘에 빠진, 자존보다는 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들에게 그의 존재는 진정한 예술가의 초상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전시리뷰] 천재가 사라진 시대, 예술가 초상
입력 2005-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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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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