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 정착한 이민들은 성비의 불균형으로 결혼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남자가 10배 가량이나 많아 대부분 혼기를 놓치고 있었던 것.
한인규수만을 고집하는 한인노총각들 때문에 골치를 앓던 농장주측과 목사들은 고육지책 끝에 급기야 한국으로 신부감을 찾아 떠났다.
이래서 등장한 게 「사진신부」. 1912년~24년께 하와이 현지서 보낸 청혼남자들의 사진(신랑사진은 10년전에 찍은 것도 많았다)만을 보고 9백51명의 여자가 낯선 이국땅을 찾았다.
이들은 1978년 당시 생존자 1백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밝힌 대로 『돈을 많이 번다기에』 『문명국가 미국에 가면 생활이 나아질 것 같아』 『남자들의 횡포와 서자라는 설움이 싫어서』 등의 이유로 하와이에 정착했다.
기대와는 달리 숱한 역경을 겪은 이들은 그러나 현지 한인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독립운동과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와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교민들은 교회마다 한글학교를 만드는 등 교육열을 과시했다.
정점에 서있던 게 1918년 李承晩박사를 주축으로 세워진 「한인기독교회」.
이 교회는 1915년 6월 한인감리교회의 중앙학원 원장직을 맡고 있던 李박사가 교육방침이 틀리다며 사퇴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와이대학 崔永浩교수는 『중앙학원은 美 감리교회서 통제하고 있었는 데, 미국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한인청소년양성을 목적으로 했지만 李박사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힌다.
독자 행보에 나선 李박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기독학원」이란 학교를 만들기에 이른다.
초등학교 6년과정(남여공학)인 이 학원에선 매년 80~90명이 공부했다.
학원의 설립자금은 한인사탕수수노동자, 한인 상인·사업자, 감리교회 재단에서 협력했다는 게 吳중정 하와이 3대 영사의 증언이다. 학원은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양유찬박사(하와이 외과의사, 6.25당시 주미대사), 한국인 최초의 공학사인 김찬진씨, 건축가 박관규씨 등이 그들이다.
하와이교민사에서 하와이기독학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학원이 1954년 현재의 인하대학교(개교당시 인하공과대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기독학원은 교민생활이 안정적인 기반을 갖춰가면서 필요성이 점차 희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원의 부지와 재산을 매각해 얻은 15만달러가 인하대 설립자금으로 활용됐다.
지금까지 공대설립의 최초제안자는 하와이이주민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와이교포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고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강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미국의 MIT와 같은 공과대학」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했던 것은 李承晩 초대대통령이라고 당시 吳중정영사와 하와이대 金창원동창회장은 지난 97년 밝혔다.
吳영사는 『대학설립의 아이디어를 낸 李대통령이 기독학원의 자금을 설립자금으로 쓰기 위해 학원이사회에 지시를 내렸으며 하와이현지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예치해 두자며 일부 이사들이 반대하자 한국으로 불러 설득했다』고 말했다.
金회장은 『대학을 만들겠다는 李대통령의 의지가 하와이로 전달됐으며 매각대금을 인계했다』고 당시 사정을 전했다.
인하대 사학과 李榮昊교수는 『이같은 증언과 현지 교민인터뷰, 유적지 순례, 교민사회의 분위기 등을 종합할 때 李承晩 대통령이 대학설립을 주도했음은 확실해 보인다』고 밝혔다.
대학설립은 기독학원의 매각대금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당시로선 거금인 1백만불)속에 이뤄졌다.
교명도 하와이 이민선이 처음으로 떠난 인천의 「仁」과 하와이의 첫 자를 빌려와 「仁荷」로 지어 의미를 부여했다.
개교행사가 국가수반을 비롯 정부부처장관이 대거 참석하는 대대적인 규모로 치뤄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런데 대학설립이 하와이교육정신과 독립운동의 결과물을 되살리고, 공업기술의 「메카」를 만들겠다는 이상적인 정신에서만 비롯됐는 지에 대해선 의견이 여러 갈래다. 李교수의 분석은 이렇다.
『1950년대 미국의 對韓경제건설의 방향은 소비재조달에 집중됐다.
정부는 이러한 원조체제에서 벗어나 자립경제를 구축하자는 내용의 경제건설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공과대의 설립은 경제건설과 맞물려 이를 교육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정부의 국가경제정책, 교육정책속에서 대학설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밀가루로 대변되는 미국의 원조체제속에 자립적 경제기반시설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를 정책화한 게 공대설립이라는 해석이다.
하와이교민들은 대학설립후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金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1958년께는 하와이동지회 건물을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2]하와이 이민과 인하대학교(下)
교민들 땀 母國대학 밑거름
입력 1999-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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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5-0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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