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_3:국내최초의 성냥공장과 담배공장 下)
인천의 성냥공장은 성냥제조업의 시발점이자 본거지라는 연대기적 의의 말고도 일제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치하에서 쌀의 일본유출이 많았던 인천항 주위엔 정미소들이 많았고, 이들 정미소 노동자와 인천부두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인천에는 정미소 못지않게 성냥공장도 많았던 만큼 성냥공장에서의 파업도 상당했다. 정미소 다음으로 노동쟁의가 극렬했다는 것이다.
「인천시사」 등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성냥공장의 여직공들은 1만개의 성냥개비를 붙여야 60전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노동시간은 하루 평균 13시간에 달했다.
그런데 일본인 경영주들은 이런 어린 노동자의 임금마저도 인하하려 했고, 이를 도화선으로 인천지역 각 성냥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따랐다.
성냥공장에서 벌어진 첫번째 파업은 1926년 4월에 발생한 금곡리(현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의 파업으로 「임금인하에 반대」가 파업의 목적이었다.
파업이 한달동안 장기화하면서 경찰이 개입하기도 했으나 고용주가 결국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승인함으로써 해결됐다. 이어 수차례의 파업이 잇따랐으나 역시 노동자의 승리로 끝났다.
노동자들은 1932년 이후에도 임금인상과 일본인 감독 배척을 요구조건으로 파업을 다시 일으켰으나 노동자가 경찰에 검거되는 등 경찰의 탄압과 장기간의 파업으로 인한 생계에 위협을 이겨내지 못해 요구조건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성냥공장 파업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성노동자가 많았던 만큼 단순한 임금투쟁 외에 일본인 감독에 대한 항의파업이 많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제 식민지하에서 일본인 감독들은 어린 여직공들에게 수시로 인간적인 모욕을 주는 일이 허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趙우성씨(52·광성고교사) 등 향토사 연구가들은 『인천 노동운동사는 물론 여성권리의식의 뿌리를 찾는 측면에서 성냥공장의 파업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세월을 지나 성냥공장은 해방을 맞으며 한국인 운영체제로 탈바꿈한다. 愼태범박사(84·인천 한세기 저자)에 따르면 일제가 물러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공장들은 미군정 산하 「적산관리처」의 관리아래 운영권이나 재산권을 한국인에게 넘겼는데 비교적 대형공장은 서울사람들이 장악하고 소규모업체만 인천사람들이 접수했다.
愼박사는 『해방후 어수선한 틈을 타 서울 사람들이 재빨리 미군정에 손을 써 성냥공장을 접수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인천사람들은 소규모 영세업체들만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Zippo)라이터가 유행했고 미군이 물러간 뒤에는 국내에서 생산된 유사제품이 한 때 범람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생활 필수품이었던 「성냥」의 종말이 사실상 예고됐다. 특히 전자점화장치의 개발로 1회용 가스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인천의 성냥공장은 60년대 들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래도 성냥은 한국전쟁 이후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을 당시 전쟁피해자들을 보듬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동구 금곡동 주민 郭정자씨(여·57)는 『한국전쟁 이후 금곡동 지역 각 가정에선 가족 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오갈데없는 사람들까지 가세해 성냥갑 만드는 일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성냥공장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천에 세워진 공장중 하나로 담배공장을 빼놓을 수 없다.
오래전 부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연초를 재배하긴 했지만 개항 이래 권련과 시거 등 근대적인 외국제 연초들이 대량으로 수입, 판매됐다. 인천에는 이미 1887년에 외국제 연초를 판매하는 상점이 있었다.
흡연자도 매년 늘어나 1903년 외국제 연초의 수입액이 42만원이던 것이 1904년에는 1백14만원에 달하는 등 수요가 폭증하기도 했다.
「인천시중구향토사」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처음의 담배공장은 미국과 영국이 합작으로 설립한 「英美卷煙회사(The British_American Tabaco Company)」로 이 회사는 1899년(광무 3년) 말부터 담배를 생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선 이 회사가 「上海 漢口에 공장을 두고 인천항을 통해 「히어로(HERO)」라는 상표를 가진 권련을 수입, 판매하다 1908년 3월에는 인천에 중국지계안에 분공장을 설치하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인천시사)고 적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또 인천시사에 따르면 1900년에 이미 안드레 필립이라는 희랍인이 영국인과 합자해 「東洋煙草회사」를 설립하고 그해 5월부터 생산을 개시했는데 홍수처럼 수입되는 외국제 담배와 경쟁할 수 없어 영업을 중지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4]국내최초의 성냥공장과 담배공장(下)
입력 1999-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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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5-1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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