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_7:객주회>
우리나라에서 상인단체가 「근대적인 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나타난 「객주」 부터다.

조선이 외세에 의해 굳게 걸어 잠궜던 「빗장」을 풀면서 서양자본과 상업자유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치자 전통적인 의미의 상인들이었던 공인과 보부상 등은 빠르게 도태되어 갔다.

반면 새롭게 도매업을 담당하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이른바 「객주」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객주는 강제개항 이전 부터 국내 상업의 중심지였던 서울로 반입되는 物貨의 상거래를 담당했다. 이들은 주로 인천항 등 교역포구에서 물화를 수집해 직접 팔거나 위탁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1890년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객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한국의 객주는 대개 물화의 수탁매매에 종사하고 아울러 금융의 알선을 업으로 하고 있다.

각 지방의 하주들이 미곡 등을 개항시장에서 방매하고자 할 때 하주는 먼저 자기가 믿고 있는 객주에게 미곡을 수송하든 가, 또는 자기가 수송해서 객주에게 방매를 위탁한다.

객주는 그 위탁을 통해 화물을 일본상인에게 매도하고 계산을 한 뒤 상당한 구전(수수료)을 받는다.

또 지방상인이 화물을 외국상인한테 구입하는 경우에도 객주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즉, 그 당시엔 지방상인들이 모두 객주를 통하거나 「개항시장」에서 물화를 구입하고 외국상인에 대한 위탁판매도 맡았다.

아울러 판매를 한 후 어음을 받았을 때에는 그 어음을 객주에게 할인하거나, 혹은 그 어음을 갖고 다시 물건을 구입했다.

「인천 한세기」 저자 愼兌範씨(88)가 회고하고 있는 객주도 이와 비슷하다.

愼씨에 따르면 인천항 주변에 몰려든 객주들은 상품(주로 미곡)의 매매알선을 주업무로 했으며 보관업과 운송업, 화주 또는 매주에 대한 대부 및 어음발행 등의 업무와 숙박업, 음식업 등 잡다한 기능을 맡았다.

특히 인천의 객주는 개항과 동시에 황해도 해주와 충청도, 경기도 김포, 서울 등지에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형 창고를 지으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들은 창고를 지은 뒤 각 지방에서 「풍선(風船)_돛단배」 등을 타고 올라온 상인들의 쌀을 보관하고 대신 그들에게 「창하증권(倉荷證卷)」이란 보관표로 나눠 줬다.

그리고 이들은 그날 그날의 미곡 시세를 봐가며 자기들이 거느리고 있는 거간꾼들을 이용, 정미소 등에 팔았다.

愼씨는 『당시 명산품이 있는 곳엔 객주가 있었다』며 『인천엔 미곡을 담당하는 미곡객주가 주류를 이뤘으나 직물 물산객주, 유기 물산객주, 수목 물산객주 등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인천의 객주는 내리(내동), 용리(용동), 외리(경동), 율목리(율목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5~6곳은 꽤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들은 때에 따라서 동해안 등지로 직접 가서 북어 등을 구입, 객주집에 쌓아 놓기도 했다. 그 무렵 객주에 널어 논 북어눈알을 빼먹는 게 하나의 놀이였다고 愼씨는 회고한다.

결국 인천항 객주의 출현은 인천지역으로선 첫 「거대자본의 유입」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들 객주 덕분에 요식업과 선술집 등도 덩달아 번창하게 됐음도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천지역의 원로 張@睦씨(80·인천개발공사 이사)는 『당시 지방상인들이 인천에 머물며 벌어들인 수입을 대개 명월관과 일월관 등 술집과 음식점, 내외주점(지금의 방석집)등에서 소비함으로써 한때 성황을 이뤘다』고 전한다.

객주는 이렇게 활동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나 현물거래와 선물거래가 가능했던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가 생기면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미두취인소란 1백석을 단위로 쌀을 사고 파는 곳으로 현물매매를 비롯해 1개월 후 현물거래, 2개월 후 현물거래 등을 할 수 있었다. 일종의 투기장소였던 셈.

명칭을 보면 현물거래를 당한(當限), 1개월후 거래를 중한(中限), 2개월후 거래를 선한(先限)이라 했다.

주위에선 그 때 미두취인소에 드나들던 사람을 『미두꾼』, 또는 『미두장이』라 불렀고 이들중엔 투기를 하다 「패가망신」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쌀을 싣고 왔던 일부 상인들은 객주에 쌀을 맡긴 채 수익금을 갖고 미두취인소에서 투기를 했으며, 그에 따라 고리대금업도 성행했다.

미두취인소가 활성화하면서 쌀의 시세차익을 노리는 많은 이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객주 또한 도매업과 숙박업 등을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인천의 대표적 객주론 沈能德씨와 崔承宇씨, 미두객주였던 具昌組씨 등이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두」때문에 명맥을 유지하던 객주들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