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14:성누가병원과 랜디스박사

인천시 중구 내동 3 대한성공회 「인천성미카엘성당」 일대는 구한말 「약대이산」으로 불렸다.

요즘 인천인들에겐 자유공원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약대이산」은 약대인(藥大人·서양의사라는 뜻)산에서 와전된 말.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이자 랜디스(한국명·南得時)박사의 의료선교활동을 담고 있는 지명이다.

랜디스박사가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 고르페(한국명·高耀翰)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인천에 들어온 것은 1890년 9월 29일이었다.

당시 인천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세계 열강의 「각축장」으로 등장,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랜디스는 그해 10월 10일 중구 송학동(정확한 주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에서 비교적 큰 집을 세로 얻어 방 두칸에 진찰실과 입원실을 꾸렸다.

그 무렵만 해도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려도 무슨 병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죽거나 민간요법 등을 통해 겨우 응급조치를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터에 금세 죽을 것 같았던 사람도 랜디스박사 병원을 다녀온 뒤 씻은듯이 나았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병원문을 열고 3개월 동안 34명의 입원환자와 76명의 외래환자, 왕진진료 25명이란 성과를 거뒀다고 「성공회 90년사」는 적고 있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겐 치료비를 받지 않았으며 「의료선교비」는 고르페주교가 복무했던 영국 해군에서 지원받았다고 한다.

랜디스박사와 고주교는 환자가 급증하자 1891년 4월 20일 송학동 3가 3(현재 중구 내동 3번지)에 2백50달러를 주고 외국인 조계지역 터를 구입, 병원다운 병원을 짓기에 이른다.

이어 그는 그 해 새 병원으로 옮기면서 한국사람을 위해 병실에 침대가 아닌 「온돌방」을 꾸미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랜디스는 특히 응급환자가 생기면 앰뷸런스 대신 「가마」로 환자를 수송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곳이 바로 인천 최초의 병원인 「성누가병원」이다.

인천에서 병원이란 간판을 처음 내건 서구식 병원의 효시인 셈.

1883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에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여기선 일본인들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불과 1년여만에 랜디스박사의 「한문실력」은 꽤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는 일화 한토막.

랜디스는 성공회에서 처음 「성누가병원」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을 반대했다.

한국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랜디스가 내건 병원 이름이 「藥善施直阮(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이다.

랜디스는 의료선교에만 그치지 않고 「영어학교」와 「고아원」도 운영했다.

낮에는 환자들에게 인술을 펼치는 한편 저녁에는 영어학교에서 매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1주일에 여섯차례씩 40명의 학생들을 4개반으로 나눠 영어를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892년 부모를 잃은 여섯살난 고아를 데려다 함께 생활하기 시작해 1896년 쯤엔 5명의 고아들을 길렀다.

인천지역 최초의 고아원이었던 셈.

랜디스박사가 한국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 지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다.

고주교가 영국 선교부(S.P.G)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랜디스의 생활을 잘 알 수 있다.

『다른 날도 마찬가지만 오늘 그가 한 일들을 말씀드립니다.

환자들이 아침 7시부터 물려들기 시작해 오전 11시 30분까지 모두 35명의 외래환자를 진찰하고 오후에도 진료는 계속됐습니다.

오후 5시부터 8시까진 영어학교 강의를 하고 그 후에도 1명의 환자를 더 진료했으며, 8시 30분께 저녁식사를 하고···』

랜디스는 이처럼 바쁜 진료활동중에도 「학문」에 정열을 쏟아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1894년엔 불교서적인 「로사리 수트라(염주경)」를 번역해 그 이듬해 책으로 펴내는 등 불교문헌 3편을 번역, 출판했다.

랜디스는 그밖에 수많은 동화와 역사문헌 등을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책 3백여권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 「랜디스 문고」에 보존되어 있다.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매달린 탓에 그는 결국 1898년 3월 과로로 쓰러졌다.

랜디스는 병석에 누운 지 불과 한달여만인 4월 16일(토요일) 신부와 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2세란 짧은 삶을 마감했다.

「성공회 90년사」엔 랜디스의 장례식날을 이렇게 전한다.

『랜디스박사의 장례식이 있던 날 천둥과 번개가 심해 그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국을 몹시 사랑했다···.』

랜디스(1865년_1898년)는 미국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시」에서 태어나 펜실바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랭카스터 공립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