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17:자유공원>

중구 송학동을 비롯 관동·항동·북성동·송월동·선린동을 감싸안고 있는 응봉산(鷹峯山·일명 매부리산) 일대를 인천인들은 자유공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란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자유공원은 1888년 조성됐으니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년)보다 9년 앞선 셈이다.

「강제개항」이전 까지만 해도 해발 69m로 야특막한 야산에 불과했던 응봉산이 공원으로 유명해진 것은 개항이후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지계를 설정하면서 부터다.

1883년 청국과 일본이 선린동 일대에 지계를 설정하자 영국과 미국, 독일 등 3개국도 서둘러 해안지대와 응봉산 자락 14만여평을 쪼개 지계로 만들었다.

각국 지계는 A,B,C,D 등 4등급으로 나뉘었는 데, D지구로 분할된 지역이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됐다고 한다.

자유공원은 처음엔 각국공원(各國公園)으로, 그리고 해방전 일제시대엔 서공원(西公園)으로 불렸다.

이후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부르던 것을 인천시가 1957년에 자유공원(自由公園)으로 이름을 바꿨다.

자유공원이 「공원」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88년 당시 독일인이 경영하던 세창양행에서 부지를 매입, 직원들을 위한 서양식 사택을 지은 후 제물포구락부(현 인천문화원)가 들어서면서 부터다.

세창양행 사택은 일제 때 부립도서관으로 개조됐다가 해방후 인천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폭격에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천한세기」의 저자 愼台範박사(80)는 『중학생 때 입학시험 공부를 하려고 부립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고 회고한다.

1905년에는 중국 상해에 살던 영국인 존스톤이 산자락에 독일성곽을 연상케 하는 별장을 세워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후 1936년 인천부가 이 별장을 사들여 인천각(仁川閣)이란 이름으로 호텔 겸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해방후엔 미군숙소로 사용되다가 세창양행 사택과 함께 전쟁중 폭격을 맞아 없어졌다.

愼박사는 『존스톤 별장은 세창양행 사택과 현 올림포스호텔 자리의 영국영사관, 청관건물 등과 어우러져 우아한 이국정취를 풍겼다』며 『의대를 졸업하던 1943년 학위를 받은 기념으로 인천각에서 축하연회를 갖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유공원의 별칭도 있었다.

오정포산(午正砲山) 또는 오포산(午砲山)이 그 것.

「인천석금(저자 高逸)」에 따르면 1908년 관측소가 대포에다 화약을 넣고 쏘면서 시보(時報)를 알렸다.

그러다 얼마후 대포가 사라진 대신 홍예문 언덕에 세운 철탑 소방망루에서 「사이렌」으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자유공원엔 이밖에도 근대화의 풍물과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얘기거리가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천기상대」와 「공설운동장」을 꼽을 수 있다.

인천기상대는 국내 최초의 기상대로 기록된다.

일제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전략수립의 방편으로 임시 기상관측소로 세운 것이다.

인천기상대는 해방을 맞으면서 1945년 미군정하 중앙관상대로 발족한 후 1953년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제물포고등학교 부지에 들어섰던 공설운동장(웃터골 운동장)은 인천체육의 발원지로서 의미를 지닌다.

1920년 11월 1일 일제가 공설운동장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할 무렵만 해도 이 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천혜의 체육시설이었다.

솔밭 골짜기에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 천연의 필드를 갖춘 데다 세 면의 산언덕은 스탠드 구실을 했던 것.

일제는 이용자가 늘자 1926년 확장을 했다가 1934년 도원동에 공설운동장을 준공해 옮겼다.

그 이듬해엔 이 자리에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중학교가 설립됐다.

중구청 부구청장을 지낸 李근식씨(61)는 『인천인들은 오래전 부터 제물포고 일대를 웃터골로 불렀다』며 『웃터골에는 웃턱·중턱·아래턱 등 세 턱이 있었는 데, 턱마다 약수가 나왔다』고 전한다.

자유공원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또 하나 있으니, 1957년 10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해 세운 「맥아더장군 동상」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군원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맥아더 동상」의 건립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를 도와준 용장(勇將)을 기억하는 의미로서보단 이 땅의 비극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상징으로 바뀌어 갔다.

지난해 인하대 정외과 徐규환·朴동균 교수가 인천시내 중·고등학생들에게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1위가 「맥아더 장군」으로 나타나 시민들을 씁쓸하게 만들기도 했다.

80년대 말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상당수 인천시민들은 「맥아더 동상」을 송도 「6·25전쟁기념박물관」으로 옮기고 자유공원을 되찾자는 의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