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18:국내 첫 공연장 협률사>

인천은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이후 서구문물 유입의 관문구실을 톡톡히 했다.

온갖 새롭고 진기한 문물을 처음 접하는 「전시장」이었던 셈.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중에서 최근 각종 공연과 영화 붐을 타고 새삼 주목받는 게 하나 있으니, 협률사(協律舍)가 바로 그 것이다.

공연예술의 초창기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뜻에서다.

협률사는 재판소 구성법을 포함해 행정관과 사법권을 분리하는 을미개혁(乙未改革)이 단행되던 1895년 세워졌다.

조선황실에 의해 1902년 서울 정동에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보다는 7년, 이인직(李人稙)이 1908년 7월 종로 새문안교회터에 창설했던 원각사(圓覺寺)보다 14년이나 빨리 개관된 국내 최초의 공연장이었다.

서울 협률사와 원각사가 관주도로 황실과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반면 인천 협률사는 개인에 의해 설립된 첫 사설극장이기도 하다.

협률사를 만든 이는 「총각엿장수」에서 인천갑부로 등장한 부산출신의 정치국(丁致國)이란 사람이었다.

일본말이 귀하던 시절 그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인과 결탁해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금의 애관(愛館)극장 터인 용동(龍洞)에 벽돌집을 지어 협률사 문을 열었다.

당시 무대에 올렸던 작품들은 조악한 무대세트와 통속적인 줄거리 등으로 인해 요즘과 비교하면 「3류 연극」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

「박첨지」 「흥부놀부」 등 토속적인 제목의 인형극을 비롯 창극이나 신파극 등이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줄타기와 땅재주, 승무 등 수준급 공연도 종종 펼쳐졌고, 「성주풀이」란 구한말 가요를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1913년 11월 국내 극단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단원들이 이 곳에서 공연한 신파극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는 인천 신연극(新演劇)의 효시로 기록된다.

이후 협률사는 새로운 이미지를 꾀하며 몇차례에 걸쳐 이름을 바꿨다.

축항사(築港舍)로 개명한 데 이어 1915년 이를 떠맡은 홍사헌(洪思憲)은 다시 애관극장이란 새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 때부터 비로서 연극과 영화를 주로 올리는 상설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협률사는 이에 앞서 1897년 인천좌(仁川座), 1905년 가무기좌(歌舞技座)등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문을 연 공연장의 모태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 가무기좌에선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신구극과 마술단 공연을 주로 올렸다.

이들은 공연장 객석을 일본 전통 마루형식인 다다미로 꾸며 놓고 우물 정(井)자 형태로 막았다.

그리고 안내와 시중을 드는 음식장사가 궤짝을 들고 다다미 사이를 다니면서 먹을 것을 팔았다고 전해진다.

협률사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초창기 연극인들로는 인천출신의 배우인 원우전(元雨田), 서일성(徐一星)을 비롯해 이백영(李白永) 등으로 이뤄진 토월회(土月會)가 있었다.

이 모임은 후에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로 이름을 바꿨다.

토월회를 통해 배출된 연극인으론 국내 연극장르의 개척자로 최근 들어 존재가 부각된 인천출신 극작가 함세덕(咸世德)과 연기자 겸 연출가인 정암(鄭岩), 무대장치가 임창복(林昌福), 임영균(林榮均), 송수안(宋壽安) 등이 꼽힌다.

이들은 칠면구락부 창단과 함께 1926년 「춘향전」, 「칼멘」, 「사랑과 죽음」 「눈물의 빛」 등을 차례로 무대에 올리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국내 연극사의 한 획을 그었다.

인천의 언론인 고일(高逸)선생이 지은 「인천석금(仁川昔今)」에 따르면 해방후엔 포스터나 신문광고, 가두 포스터 등 여러 매체를 통해 홍보를 했지만 일제 때 애관극장에선 큰 북 작은 북을 지게에 짊어진 극장전속 고용인이 조그만한 쇠북까지 동원, 박자에 맞춰 두들기고 다니며 공연 프로그램을 안내했다.

그리고 초창기 영화관엔 남존여비(男尊女卑)현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남자는 왼편 줄에 여자는 오른편에 앉도록 구별했다는 것.

그런가 하면 개관 1주년을 맞아 애관극장에선 관객들을 대상으로 사은품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1등엔 백미 1표(俵), 2등엔 광목 한필, 3등엔 약주 한되를 상품으로 내걸었다고 하니, 자동차와 고급 전자제품 등을 상품으로 걸고 관객을 끌려는 요즘이나 그 때나 세상살이 풍경은 매한가진 것 같다.

6.25동란중 소실됐다 다시 문을 연 애관극장은 전쟁후엔 공연장으로서는 물론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장소 역할까지 담당, 강연회나 연주회 등도 종종 열었다.

변변한 공연장소가 없던 상황에서 세계적 음악가인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고, 역대 최고의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던 최승희도 아름다운 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