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26:웃터골 운동장과 한용단>
『웃터골 운동장과 한용단(韓涌團)을 아십니까?』
승리와 패배가 반드시 갈리는 운동경기.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어느 땐 밤잠을 설치게도 한다.
우리나라를 흔히 「체육 강국」이라고 표현한다. 최근들어선 올림픽 등에서 꾸준히 상위에 입상하며 국민들을 즐겁게 했다. 이런 국내 체육의 효시가 바로 「웃터골 운동장」과 「한용단」이다. 외국에서 번창했던 체육종목들이 개항과 함께 인천을 통해 처음으로 국내에 들어 온 것이다. 체계화한 규칙과 운동기구들은 당시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국내 최초의 경기들이 인천에서 속속 벌어졌다.
웃터골 운동장은 중구 전동 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다. 일본강점기 오포산(午砲山)과 인천관측소 바로 밑에 있었던 넓은 분지는 「천연 그라운드」였다. 이 곳에선 그 무렵 외국문물 도입과 함께 서구식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로 부터 퍼지기 시작했던 야구와 육상, 축구 등의 종목과 각종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넓은 평지에 주위의 기슭이 훌륭한 스탠드구실을 하며 인천지역 최대 스타디움으로 각광받았던 것이다.
체육회 원로 李成滿씨(79)는 『당시 변변한 운동장이 없던 인천에서 웃터골 운동장은 일반 학교운동장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적인 훌륭한 체육시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야구경기를 위한 백네트 시설이외에 축구 골포스트조차 없었지만 일본인들이 1935년 이 곳에 인천공립중학교를 세울 때까지 웃터골은 인천 유일의 체육공원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웃터골 운동장에서 열렸던 수많은 경기중 아직도 많은 인천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기가 있다. 한인들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야구팀인 「한용단(韓涌團)」과 일본인 쌀거래소 직원들로 구성된 미두취인소 소속의 「미신(米信)」팀과의 야구경기가 바로 그 것.
1912년 이후 인천상업학교의 전신인 인천남상업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시작한 야구는 당시 경인선을 이용,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한인학생들의 친목회 「한용단」을 하나로 묶는 구실을 했다. 「한용단」은 소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울의 양정이나 배재, 중앙, 휘문 등 고등보통학교를 오가야 했던 학생들이 만든 조직. 이들 통학생은 나름대로 앞칸엔 남학생, 뒷칸엔 여학생이 탄다는 불문율을 만들기도 했으며 편도 55분, 왕복 2시간여 동안의 통학을 통해 친목을 다져 나갔다. 이들이 1920년 6월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씨(郭尙勳)의 노력으로 야구단을 만든 것이다.
당시 활동했던 야구인으론 배재학당에 다니던 최영업(崔榮業) 이수태(李壽泰) 박안득(朴安得)과 중앙고보의 김영길(金榮吉) 등이 있었다. 특히 배재학당의 함용하(咸龍華) 장의식(張儀植), 휘문고보의 김정식(金貞植)등은 요즘으로 말하면 스카우트를 거친 선수들이었다.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을 정도로 일본인팀들과 경쟁도 치열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당시 최영업씨 등과 함께 투수로 활동했던 김종세(金鐘世)씨는 「공보피쳐」라는 별명을 얻으며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일본인들도 미신(米信)팀 이외에 경전조(慶田組)가 중심인 「미나토」, 인천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등을 중심으로 야구팀을 조직했고 한용단과 웃터골 운동장에서 매주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치뤘다고 한다. 「인천한세기」 저자 신태범(愼兌範)박사는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어렸을 때 웃터골에서 애를 태워 가며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믿음직한 한용단 선수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며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놓고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였다』고 회상했다. 신박사는 특히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려 가면서,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으로 마음껏 떠들어댔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지게를 세워놓고 구경하다가 조갯살과 생선을 썩혀버렸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주민들은 그때나마 소리를 질러가며 일본에 주권을 빼았긴 한을 풀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천인들의 열기도 오래 가진 못했다. 1924년 한용단과 미신간의 주말 결승전 때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한용단이 우승을 놓치자 흥분한 응원군중이 본부석으로 몰려 가 충돌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용단의 산파역을 맡았던 당시 단장 곽상훈씨와 인천서 검도사범을 하던 기요다(淸田)가 실랑이를 벌였고 급기야 이 사건을 계기로 야구 경기는 중단되고 말았다. 야구금지령은 2년후인 1926년 야구를 좋아하는 요코다(橫田)가 부윤으로 부임하면서 경기장 확장과 더불어 풀렸지만 일본인들의 저지인천이야기-26:웃터골>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26]웃터골 운동장
입력 1999-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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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7-2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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