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_27:전환국>

『조선정부는 국가재정과 국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외국과의 통상을 원활히 하고자 근대 화폐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건의로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고 1886년 독일로 부터 조폐기기를 도입,1888년 우리나라 첫 서양식 기계로 화폐를 제조했다···.』

조폐공사 산하 화폐박물관에 기록된 국내 화폐탄생 배경 설명이다. 이 문헌은 『전환국은 당시 조폐권을 장악하려는 중·일·러 등 열강들의 대립과 계략으로 경성전환국(1885~1892), 인천전환국(1892~1900), 용산전환국(1900~1904)으로 옮겨 다니며 우여곡절을 겪다 화폐제조를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 넘겨주고 21년만에 막을 내렸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 첫 근대식 화폐제조 공장을 도입했다는 기록이다.

인천전환국은 이제 그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지만 8년여 동안 인천에 둥지를 틀고 근대화폐 탄생의 한 축을 이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곳은 주화를 제조하던 전환국 자리로서 종래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상평통보가 무거워 고종 22년(1885) 서울에 전환국을 설치, 1887년 부터 서양식 주화를 제조했으나 주화제조에 필요한 동을 일본에서 수입, 사용한 관계로 원료운반이 용이한 곳으로 1892년 5월에 옮겨 이전, 경인철도가 완공된 후 1900년 8월에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다」

중구 전동(典洞) 舊 인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현재 동인천동사무소 자리) 한켠에 서 있는 표지판 전문이다. 이 표지판은 「구적 한국시대 조폐소시적(舊蹟 韓國時代 造幣所地跡)」이란 비석과 함께 과거 전환국 자리였음을 알리고 있다. 지금의 조폐공사 역할을 한 인천전환국의 탄생은 1885년 서울에 설치된 「전환국 조폐청」을 인천여고 자리로 옮기면서 부터다.

그 무렵 우리 정부는 일본의 도움을 빌어 주화제조에 필요한 기계와 기술 등의 수입이 쉬운 인천으로 전환국을 옮겼다. 당시 주화제조는 독일인의 기계와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주화의 원료인 동(銅) 또한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 조폐창은 여러모로 적절치 못했다.그래서 결국 1892년 4월(고종 29년) 인천에 전환국을 세운 것이다.

개청시 인천전환국 관리자는 朴정양이었으며 청사는 모두 3동으로서 「ㄷ」 자형을 이루고 있고 가운데에 마당이 있었다. 중앙 건물에는 칭량실(秤量室), 사무소, 화폐조사실, 극인실(極印室) 등을 두고 있었고 동쪽 건물에는 지금창고(地金倉庫), 기관실, 기관실(機關室)등이 자리잡았다. 또한 서쪽 건물에는 정화창고(正貨倉庫)를 비롯 조각소, 감찰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중구 전동(錢洞)에 들어선 인천전환국은 한 때 새 화폐를 주조하면서 국명을 대조선(大朝鮮)이라고 새겼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대(大)자를 붙인데 대해 반발, 발행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종 31년 1894에 청일전쟁 이후 용산전환국으로 이전할 때까지 다시 발행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된 화폐는 크게 5量, 1量의 銀貨와 2錢5分의 白銅화, 5分의 赤銅貨 1분의 黃銅貨 등 5종이었다. 모양은 일본 화폐양식을 취해 고종 25년 서울 전환국에서 만든 화폐와 거의 흡사했다. 그러나 이후 차별을 위해 태극장(太極章)을 없애고 대신 이화장(李花章)을 새겨넣기도 했다.

인천문화원 金鳳洙 사무국장(65)은 인천전환국이 전동에 자리잡았던 배경에 대해 『당시 홍예문을 기준으로 송학동과 전환국이 자리잡은 전동에 일본인들이 특히 많이 살았다』며 『전환국이 이 곳에 생긴 것도 항구와 가깝다는 점과 일본인들이 모여 산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지금의 전동(錢洞)이란 명칭 역시 전환국에서 유래했다. 가천문화재단 문화부장 李형석 박사(66)는 『전동(錢洞)이란 이름은 전환국이 들어서면서 붙여진 것』이라며 『그후 전환국이 용산으로 이전한 뒤 새롭게 전동(典洞)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해방후 줄곧 전동에 살고 있는 金관식씨(61)는 『전환국 터 주변엔 훗가이(쌍학) 양조장과 조일 양조장, 백합 양조장 등이 들어섰다』며 『웃터골과 전동 주민들은 예전부터 전환국이 있었던 이 곳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설명했다.

「근대화폐 탄생지」였던 인천전환국은 그러나 경인철도공사가 진행중인 광무 2년 1898년 10월 이전을 결정한 뒤 경인철도 개통 1년후인 광무 4년(1900년)에 설치한 지 8년만에 폐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후 그 자리엔 인천고등여학교(인천여고)가 들어섰으며 현재는 동인천동사무소가 위치해 있다. <金鍾斗기자·jongdoo@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