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40,기와집 동네 율목동>

인천시 중구 율목동은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골로 불리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 부터 오랫동안 「기와집 동네」로 유명했다. 지금은 그런 옛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 곳은 부자들이 많이 살면서 한때 인천의 중심지로 꼽히던 마을이었다.

율목동은 구한말엔 행정구역상 부내면(府內面) 율목리(栗木里)로 면사무소 소재지였다. 그러다 1913년 인천부에 편입된 후 1937년에 율목정(栗木町)으로, 다시 1946년에 율목동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 이 곳은 내동(內洞)과 함께 인천의 부자와 유지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동네로 이름났다. 몇몇 부자들이 율목동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지역에서 돈 있고 행세 깨나 한다는 이들이 너도 나도 율목동으로 옮겨 「기와집 동네」를 형성한 것이다. 특히 주로 일본인 기와집이들이 밀집했던 자유공원 일대와 한국인 부자들이 모여 살던 율목동은 좋은 대조를 이뤘다.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1910년 당시 율목동은 2백35가구에 인구 1천49명으로 내동과 함께 부자촌의 쌍벽을 이룰 만큼 기와집이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곳엔 기와집들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경동과 신흥동, 유동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 일대가 번창하게 된 데에는 1906년 생긴 근업소(勤業所)영향이 컸다. 근업소는 일어를 무기삼아 부산지역에서 올라온 영남상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미곡중개업체. 따라서 율목동엔 부산 등 영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내리에선 일본말 자랑하지 말고 내리받이 언덕에선 주먹다짐을 하지마라. 그리고 밤나무골(栗木洞)을 지날때엔 돈자랑하지 말아라.』

일제 때 부터 율목동 일대에서 전해져 내려 온 이야기다. 내리에서 일본말 자랑하지 말라는 얘기는 이 주변이 일본인촌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 율목동에서 지금의 신생동에 이르는 내리받이(당시 花開洞, 일명 38고지라 불렸다)엔 오늘날의 화장장과 홍등가가 들어서 있었고 자연스레 건달들이 들끓었다 한다. 화장장은 1930년대 복숭아 밭이 많았던 도원동으로 이전했고 이후 여기엔 한옥주택가가 들어섰다.

율목동이 그 무렵 부촌을 이뤘던 것은 결국 정미소 등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모여 든 데서 비롯된 셈이다. 하지만 이 곳은 지난 60년대 도시재개발을 본격화면서 고풍스런 기와한옥의 명성을 잃게 됐다. 현재 율목동 곳곳엔 다가구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예전의 정취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율목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金정애 할머니(81)는 『해방을 전후해 율목동은 고급스런 기와집과 깨끗한 거리 등으로 인천의 대표적 부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묘지 근처는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율목동에 자리잡았던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유골을 묻은 곳으로 우리나라의 봉분과는 달리 평평하고 비석을 죽 늘어서 세워놓았다고 한다. 당시 신흥동에서 인천고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자리)를 다녔던 인천인들은 아직도 이 곳을 넘어다녔던 기억을 갖고 있다. 율목동 공동묘지는 배다리와 신흥동의 경계선이었던 셈. 金환씨(57·인천시 중구의회 전문위원)는 『중고등학교 시절 율목동은 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며 『학창시절 기독교병원 아래 도너츠집과 단팥죽집이 유명했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기와집과 공동묘지로 대표되던 율목동은 애초엔 야산이었고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며 망부석 등을 세워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李근식씨(60·前 중구 부구청장)는 『지난 97년 율목공원 공사로 땅을 파던 중 귀와 목 등이 잘린 망부석 6점을 발굴했다』며 『문화재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한 결과 일제강점기 전 마을을 지키고 조상의 은공을 빌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전했다. 이중 망부석 3개는 현재 율목공원 정상에 있는 도서관 옆에 진열해 보관하고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망부석을 거꾸로 매장했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다.

율목동은 또 6.25당시 미군이 상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율목감리교회가 들어선 자리엔 대포진지가 구축되기도 했다.

부자동네로 잘 알려진 만큼 율목동과 관련한 유명인사들의 이름도 자주 거론된다. 고급주단 태풍상회 金泰性씨, 제주도 지사를 지낸 민주당 원로 梁在博씨,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는 상술로 주위를 놀라게 한 문방구상 희문당 尹炳喜씨, 한글 점자를 창안,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 朴斗星 선생 등···. 하지만 율목동은 이처럼 쟁쟁했던 인천인들의 얘기와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지금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도심속 작은 동네로 남아 있을 뿐이다./金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