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54,전보와 월미도 무선전신소〉
인천의 전기통신, 즉 전보(電報)의 효시는 고종 22년(1885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정부는 청국과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을 체결한 후 인천을 기점으로 한성을 경유, 의주에 이르는 전선을 가설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한성과 제물포간에 첫 전보가 떴다.
그 때 청국은 인천이사부(영사관)에 전신국을 설치해 운영했으며 전선을 천진으로 까지 확장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조일해저전선가설조약(朝日海低電線敷說條約)에 위배된다고 항의하자 조선정부는 서울_부산간 전선을 가설, 일본의 부산통신분국과 연결해 주기도 했다. 결국 경의선과 경부선 양선이 개통되면서 의주와 부산은 전신으로 이어졌다.
당시 가장 큰 전신망 수요자는 일본인이었는 데,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글을 취급하지 않았을 뿐 더러 전보료도 비쌌기 때문. 또 관할을 서울_부산은 한국, 부산_대마도는 덴마크, 대마도_나가사키는 일본으로 두었던 탓에 더 그랬다. 또 미숙한 가설기술과 풍수해 등으로 통신두절도 빈번했고, 정확성과 신속성도 떨어졌다고 「인천개항 100년사」는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전신사무를 관장하는 전보사가 설치된 것은 1894년이다. 「인천개항 100년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는 전보총사(電報總司)를, 인천·원산·부산·전주·평양·의주·창원·경성·회령 등엔 일등전보사를, 공주·대구 등 각 도시엔 이등전보사를 설치했다. 또 각 사(司)에는 사장(司長) 1명, 총사에는 추가로 기사 2명을 두었다.
「내고장 인천」의 편집자 유동현씨는 그 무렵 전신전보 사용과 관련한 일화 한토막을 이렇게 전한다. 『대한제국때 인천세관에 근무하는 한 주사가 득남을 한 후 서울 할아버지께 전보로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할아버지는 그후 손자의 문안을 받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이 전신전보 사용을 꺼려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보에 대한 유언비어도 많았다. 「전선을 지키는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전보내용이 변조된다」, 「전보는 전기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데 전기바람은 가뭄을 몰고오는 까닭에 전보가 날아들면 그 지역에 가뭄이 든다」, 「전보를 취급하는 전보사엔 전기귀신이 살고 있다」, 「전신선을 통해 전염병이 옮겨다닌다」는 등이 그 것. 그만큼 낯선 통신수단이었던 셈이다. 인천의 전보사는 처음엔 인천 우체사(郵遞司)안에서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 러일전쟁 후인 1905년 한일통신합동운영협정에 따라 일본 통신기관에 흡수통합됐다. 전보에 한글을 사용해 능률과 편의를 높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 부터였다.(인천시사 1973년). 전보사에서 취급한 전보는 국문, 한문, 영문 및 해외전보 4종류로 확대됐다. 요금은 국내 1자당 4전, 영문은 1자당 10전이었다.
한편 무선전신은 1910년 9월 우리 정부가 월미도 및 항로 표식순찰, 세관감시 등의 업무를 수행하던 다목적용 감시선 광제호에 장착한 사용한 게 시초다. 그 후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상호간 통신과 외함선에 발착하는 관보를 중계했으나 일반전보를 본격적으로 취급하기엔 미흡했다.
김양수 인천시사 편찬위원은 『무선전신소는 일반 대중의 전보를 취급하진 못했고 일본군함에서 발착하는 관보를 중계하는 그쳤다』며 『특히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일본 해군함선이 수발주한 관보를 인천우편국에 전달하는 통로로 이용됐다』고 전했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월미도 전신소는 관심밖이었고 접근도 쉽지 않았다』며 『월미도 전신소는 당시 지부에 불과했고 관동(현재 중앙동)에 전신소 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무선전신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1923년 6월 경성부 한강통(漢江通)에서 발족한 경성무선국을 확대, 인천에 인천무선전신국이 설치되면서 부터다. 경성무선전신국은 1927년 7월 경성부에 있다가 1944년 인천 일출정(현 용현동)에 새청사를 짓고 인천무선전신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처럼 인천무선국을 위시한 각 해안 무선국이 설치됨에 따라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그 기능을 상실해 폐쇄됐고 1932년 화재로 소실됐다.
1930년에 조사한 인천지역 전화회선 가입자 및 사무취급상황을 보면 시내는 1천21회선이었고 시외는 경성_인천 16회선, 인천_김포 1회선, 인천_주안 1회선 등 18회선에 머물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해인 1948년 인천무선전신국은 용현동에서 항동 1가(현 올림포스 호텔)로 청사를 이전한 후 업무를 지속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청사와 시설이 전소되고 말았다. 그후 1956년 인천전신전화국은 항동의 청사와 시설을 복구, 업무를 재개했으며 1958년 기구 개편과 함께 인천우체국, 인천전신전화국으로 분리 독립하면서 종전의 자석식 교환방식에서 2천회선의 공전식으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54]월미도무선전신소
입력 1999-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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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0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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