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57,국내 수출의 견인차 부평공단〉
부평은 일제시대 부터 굵직 굵직한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던 곳이다. 일제가 각종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조병창을 세우자 이에 맞춰 금속·기계공업이 발달했던 것. 1930년대 말을 전후해 부평엔 동양제강과 디젤자동차공업, 국산자동차, 흥중상공 등 대규모 공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로선 국내 최대의 공업단지를 형성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후 군수공장들이 문을 닫자 산업기반시설은 대부분 가동을 멈췄다. 그 후 20여년간은 침체기였다.
그런 시절을 거쳐 부평에 다시 공단의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62년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부터. 우여곡절 끝에 몇년 뒤 탄생해 70_80년대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부평 4공단은 30여년동안 지역 주민들의 애환과 함께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후 국내 산업은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아울러 정치·사회적 혼란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60년대 들어서면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수출입국」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63년 3월 7일 발족된 한국경제인협회 수출촉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수출산업공단 예정지 물색에 나섰다. 이에 맞춰 당시 경기도와 인천상공회의소 인사들은 부평지역에 수출공단을 유치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64년 10월 수출산업공단으로 서울 구로동 지역이 선정됨에 따라 인천시는 같은해 10월 부평지구를 별도 공업단지로 지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상공부에 제출했다. 결국 이듬해인 65년 6월 16일 공업단지 심의위원회는 부평지역을 수출공단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만 해도 생활권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던 인천과 부평이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진 일화.
당시 인천출신 국회의원으로 「혁명주체」의 실세였던 유승원씨 주도에 힘입어 인천에 수출공단을 유치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돌출했다. 지역 주민들이 가좌동 해안지대와 부평을 놓고 서로 자기네 지역이 적격지라며 유치경쟁을 벌인 것. 처음에는 유의원을 비롯 인천시장과 채호 인천상공회의소회장 등 주요 인사들이 가좌동 해안지대를 매립해 수출공단을 조성하자고 강력히 주장, 후보지가 거의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해방이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부평지역 주민들이 반발을 하고 나섰다.
그 때 부평에선 많은 주민들의 생활과 직결됐던 미군부대가 용산으로 대부분 이전하면서 주민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는 등 지역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에 따라 국회의원 김숙현씨 등 지역 인사들은 수출산업공단 부평유치위원회를 구성한 뒤 정부 요로에 당위성을 알리며 유치활동을 적극 벌였다. 특히 50여명의 유치위원들은 당시 돈으로 10만_80만원씩 형편대로 갹출해 부지까지 확보하고 나서는 등 유치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여기에다 부평은 서울과 인접한 데다 김포국제공항이 가까와 교통이 편리했고 부평변전소와 부평정수장이 공단에 필요한 전기와 용수난을 해결해 준다는 강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이런 지역 주민들의 홍보활동이 먹혀 들어 부평으로 수출공단이 낙점됐고, 부평공단 초대이사장에 채호씨가 취임했다. 부평문화원 조기준원장은 『그 때 부평지역에 공단을 유치하기 위해 부지를 매입했던 기억이 새롭다』며 『지역 주민들은 공단을 유치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뜻을 한데 모았다』고 회고했다.
효성동과 갈산동, 작전동 일대 논밭 21만3천5백35평을 수용한 부평공단은 66년 4월 8일 기공식을 갖고 첫발을 내디뎠다. 유치업종으론 금속제품이 주류를 이뤘으며 합성수지와 섬유, 목제품 등 모두 12분야도 포함됐다. 단지가 조성되고 난 후 66년 7월 2일 부평공업단지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일교포 임호씨가 운영하는 코리아 크리스탈공업사가 처음으로 공단에 입주했다.
부평공단은 부지정지공사 지연으로 67년말까지 유치업체가 겨우 12개에 불과한 등 당초 계획보다 저조한 실적을 보이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 68년을 전후해 기업유치가 활기를 띠면서 업체수가 50개로 늘었다. 잡화·전자·금속 업체 등이 잇따라 입주했다. 이후 부평공단이 성공적으로 가동되고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69년 주안 염전지구에 20만평 규모로 제 2의 수출단지를 조성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결의하고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수출진흥정책에 힘입은 부평공단은 70년대 말엔 1백5개 공장이 가동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지난 92년까지 부평지역에 입주한 공장만 무려 1천63개에 달했을 정도다. 이 때 까지가 전성기였다. 80년대 들어 인근에 다른 공단이 조성되고 주위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이 속속 건설되면서 공장들이 계속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57]부평공단
입력 1999-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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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1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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