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58,수문통〉
지금은 복개해 도로로 이용하고 있는 동구 송현동 일대 수문통은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수로로 넓은 갯벌과 갈대밭이 무성한 저지대였다. 수문통의 유래는 이렇다. 제물포항 서북쪽 동구 만석동에서 북쪽지역인 송현·송림동까지 해안이 이어졌고 괭이부리(묘도)에서 지금은 육지가 된 인천교까지 넓은 갯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곳 갯골에는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구문(水口門)이 있어 수문통(水門通)이라 불렸다.
수문통은 화수·화평동, 송현·금곡동 등 인천시가지 중심부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옛 화도진도를 보면 지금의 화수동과 송현동 사이로 여러 갈래의 꾸불꾸불한 작은 실개천이 한줄기로 모여 흐르는 것으로 그려 있다. 당시 수문통은 배다리 철교까지 이어져 1930년대 까지만 해도 해산물을 비롯 다양한 물건을 실은 배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복개된 아스팔트도로 위로 차들이 달리고 있어 이 곳에 작은 배들이 다니던 갯골이었다는 얘기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화평파출소 인근에 「송현교」라고 쓰인 화강암 교각 두개가 당시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곳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수문통에 관한 일화로 「전환국(동전을 주조하던 조폐창)」을 빼놓을 수 없다. 1892년 고종 29년에 서울에 있던 전환국을 舊인천여고(현 중구 동인천동사무소)로 옮겼다. 당시 동전을 만드는 무거운 주조기를 비롯해 많은 시설을 인천까지 운반할 마땅한 육로가 없어 고민하다가 한강에서 배를 띄워 강화도를 거쳐 수문통을 통해 무사히 옮겼다고 한다.
이 수문통 일대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로 알려지고 있다.
故 高逸선생이 지은 「인천석금」에 따르면 190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일본군들이 중구 전동 근처에 주둔하면서 그 곳 주민들을 송현동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수도국산(당시엔 만수산 또는 송림산으로 불렸다) 자락에 자리를 잡은 이주민들은 양잿물이 섞인 빨래를 아래 논바닥으로 계속 흘려보냈다. 게다가 걸핏하면 바닷물까지 넘쳐 이 일대 논이 망가짐으로써 결국 황량한 갈대밭으로 변했다. 수도국산은 1909년 인천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상수도 공사가 완료되면서 인천지역에서 수돗물 공급을 시작했을 때 꼭대기에 수도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해 생긴 이름이다.
이후 일제는 인천에 도로와 항만, 공장부지, 주택 등 도시개발 확장을 하면서 많은 땅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매립사업이다. 인천지역 해안은 굴곡이 심하고 해면이 낮은 데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간조 때면 수천m에 이르는 갯벌이 드러나 바다를 매립하기 쉬운 편이었다. 1905년부터 60여년동안 벌인 동구지역 매립사업 가운데 처음 시작된(1905년~1906년) 곳은 만석동과 화수동 북쪽 해안 일대(괭이부리_현 이천전기 까지)로 7만7천5백47평에 이른다. 인천경제를 주도했던 동일방직과 대성목재가 이 곳 매립지에 공장을 세웠고 이후 한국유리, 대우중공업,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이 들어서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문통 갯골은 당시 상공회의소회장이었던 일본인 요시다(田秀次郞)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3만3천3백25평을 매립하면서 화평동에서 배다리까지 「ㄱ」자로 꺽이는 하수로를 뚫고 하류에 수위조절 수문을 설치해 바닷물을 막았다고 한다. 요시다는 이 일대를 매립해 번 돈으로 지금의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당시 보상과 노임문제로 주민과 노무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송림동에서 60여년을 살아온 前 라이프경영연구소장 朴勝鶴씨(67)는 『1950년대 초에는 배다리와 수문통 일대에서 손수레꾼들이 화목을 실어나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띠었다』며 『해방전 이곳 개천가에 들어선 야시장이 당시엔 큰 상권중 하나로, 지금의 포목점 상가의 시초였다』고 회고 한다. 이 야시장은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였던 柳昌浩씨가 개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전엔 송현동에서 송림동과 배다리까지 이어지는 긴 수로변에 반찬과 옷가지, 생필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柳씨가 수문통 개천을 복개한 후 야시장(지금의 포목점포 상가 일대)을 개설하면서부터 상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속칭 양키시장으로 불리던 중앙시장이 들어서면서 송림동·화수동·창영동·화평동·인현동·송현동 등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당시 인천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하류쪽 개천을 복개하자마자 판자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영세상점들이 난립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이 곳엔 영세상점과 판자집이 그대로 남아 흉물스런 모습이었다. 96년에 이르러서야 수문통의 나머지 부분을 복개해 그 위에 도로를 만들었다. 수차례에 걸친 정비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58]수문통
입력 1999-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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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1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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