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62,소래포구와 댕구산 포대〉

소래포구(남동구 논현동 111)엔 갓 잡아 올린 각종 싱싱한 생선과 젓갈, 그리고 협궤열차의 추억과 낭만이 있다. 주말이면 수도권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소래(蘇萊)란 지명유래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멀리 삼국시대 때부터 비롯됐다는 얘기가 널리 전해진다. 그 유래는 이렇다. 신라 무열왕 7년(660), 나-당 연합군을 결성한 뒤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치기 위해 중국 산동성 래주(萊州)를 출발했다. 소정방은 이어 지금의 인천시와 시흥시 사이에 위치한 소래산(2백99.4m)에 도착하게 된다. 그 후 '소(蘇)'자와 래주의 '래(萊)'자를 따서 이 지역을 소래(蘇萊)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소정방이 머물거나 찾았다는 이유에서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은 이 말고도 여럿 있다.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남쪽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가 그렇고, 경기도 양주군은 한때 내소군(來蘇郡·신라 경덕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반면 이런 지명유래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가천문화재단 이형석문화부장은 '인천의 땅이름' 이란 책을 통해 소래와 소래산을 소정방과 결부하는 건 무리라고 주장한다. 소래란 지명은 주위 산과 냇가에 소나무(松)가 많아 송천(松川)→솔래→소래(蘇來=蘇萊)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유래야 어찌됐든, 소래가 소래포구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무렵이다. 일제는 당시 경기도 지역의 쌀과 함께 소래 주변에서 많이 생산되는 천일염(天日鹽) 등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다. 그 때 작업인부와 염부(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나룻배를 소래포구에 대면서 포구가 활성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래포구는 일제가 대동아 전쟁에 쓸 물자를 수탈하려고 수인선을 건설하면서 수송기지로 이용됐던 셈이다.

얼마 전엔 소래포구 인근에 포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고종 14년(1877) 일본이 서해안을 측량, 개항지를 물색하자 고종이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에 대비해 인천연안에 화도진을 설치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그런데 그 무렵 소래에 포대를 설치했던 사실이 새로 확인된 것이다. 소래 '댕구산 포대'는 고종 15년 8월 어영대장 신정희로 하여금 화도진과 연희진을 착공케 한 뒤 이듬해(1879) 7월 준공했다. 이는 화도진도(조선총독부 1917년 발간, 축적 1:50,000지형도)에 나타나 있다.

화도진도를 보면 포대설치 위치가 나온다. 묘도북변포대(5문), 묘도남변포대(5문), 북성곳(북성포) 북변포대(5문), 북성곶남변포대(5문), 제물(포)북변포대(8문), 제물(포)남변포대(5문), 호구(논현)포대(2문), 그리고 댕구산(일명 장도)포대(3문)가 있었던 것. 그 전까지 알려진 화도진도(군사지도)엔 '댕구산 포대'가 없었다.

남동구청은 '댕구산 포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수년간에 걸쳐 지역주민들과 문헌을 통해 확인작업을 벌이던 중 지난 99년 9월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화도진도 원본을 통해 밝혀냈다. 1993년 발간된 인천시사에 화도진도의 총 포수는 7곳의 포대와 33문의 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댕구산 포대'의 발견으로 총 포대 8곳, 포 36문으로 늘어나게 됐다.

'댕구산 포대'는 소래포구를 가로지르는 소래철교 옆에 40m정도 높이의 작은 산(구릉)에 있었다. '댕구'란 말은 대포를 뜻하는 옛말론 '대완구'로 부르기도 했다. 화포중 가장 큰 대완구는 지름이 3㎝나 되는 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말한다. 결국 '댕구산'이란 대포가 있었던 산이란 뜻인 셈이다.

소래에 사는 최충석씨(72)는 “댕구산에 포대가 있었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 원래 포대 자리는 수인선 철도공사를 할때 일부 허물었는 데, 지금 소래철교옆 구릉이 바로 그 곳”이라고 말했다. 문헌이나 자료 등을 통해선 언제부터 '댕구산'이라고 불렀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포대를 설치한 후부터 '댕구산'으로 부르지 않았는 가 추측할 뿐이다.

일명 장도(獐島)포대로도 알려졌던 '댕구산 포대' 의 자리는 '노루목' 또는 '노렴'이라고 부르는데, 산 모양이 노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소래주민들은 전한다. 장도포대의 포 배열을 보면 2문은 바다쪽인 뱀내(만수천·장수천·은행천·내하천의 물이 모여 소래포구 앞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을 말함) 하구쪽을 향하고 있고, 1문은 동남쪽을 향해 외곽과 내곽의 수비를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수인선 개통 이후 소래포구엔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특히 수인선 협궤열차는 많은 사람들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고종이 개항 후보지로 빼앗기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