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65,인천항의 역사와 함께 한 창고업과 하역업〉

인천항의 역사는 창고업과 하역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온 갖가지 외자물자가 다 이들 창고·하역 업자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천항 주변엔 일찌감치 창고업자와 하역업체들이 자리를 잡고 부침을 거듭했다.

이중 창고업의 효시는 1905년 도지부령 제14호 공동창고회사 조례에 따라 1907년 2월 설립된 한성공동창고(주)인천출장소다. 한성공동창고는 인천항에서 5~6동의 창고시설을 마련하고 한국상인을 상대로 창고업과 금융업을 겸업했다. 그러다가 1912년 4월 (주)천일은행과 합병,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하면서 한성공동창고 인천출장소는 잠시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다. 당시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은 다른 은행과 달리 종전 한성공동창고의 창고시설을 활용, 금융업 외에 일반창고업까지 담당했다. 하지만 담보물품 보관 등에 그쳐 온전한 의미의 창고업을 수행하진 못했다.

이후 인천항의 축항(築港)시설이 1918년 10월에 시공되면서 창고업은 한 차례큰 변화를 맞게 된다. 선박의 출입이 급증하는 등 항만이 호황기를 타면서 기존 창고시설만으로는 물자보관을 감당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1919년 9월엔 오전(奧田)정미소 대표이자 인천상업회의소 회두(회장)자리에 앉은 길전수·가래영씨 등은 자본금 50만원으로 인천창고(주)를 설립했다. 이들은 인천항 축항 매립지에 연와조창고 4동을 신축하는 한편 미두취인소의 기존 창고를 인수해 창고업을 벌여 나갔다.

이에 자극을 받은 조선상업은행도 매립지에 새 창고 2백27평을 신축, 업무를 확장했다. 그러던 중 1920년 11월 인천창고(주)가 돌연 해산하고 그 시설을 매입한 (주)조선실업은행이 1924년 조선상업은행에 흡수 합병됨으로써 인천항내 창고업은 또 다시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에서 독점하게 된다. 그후 조선은행, 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출자해 설립된 조선미곡창고(주)가 1930년 11월 인천항에 지점을 개설했다. 조선미곡창고는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창고와 인천지역내 각 은행, 회사 등의 소유 창고를 매입해 창고업의 맥을 이어갔다. 이에따라 전에 상업은행이 부업적 경영으로 독점했던 창고업은 조선미곡창고에 의해 전업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이밖에 인천항에는 세관의 보세창고, 철도국의 화물창고 및 전매국, 기타 관세창고와 위험물 저장 창고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하역업은 해방후 미군 진주와 함께 따라온 군수물자의 양육(揚陸)전송, 즉 군수하역과 수조물자의 도입과 함께 태동했다. 민수(民需)하역 등을 도맡았던 하역업계는 항만경기의 활황과 하역물자 공급이 넘치면서 성장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1946년 인천항에서 취급된 화물은 출하 3만1백20톤, 입하 6만5천7백25톤에 달했다. 그 만큼 민수품 입동량은 대단했다. 주요 하역물품은 곡물과 식료품, 목재, 석탄, 석유, 시멘트, 밀가루 등이었다.

그 무렵 수조물자의 인천항 입항량은 날로 늘어나 월평균 5만~6만톤에 이르렀다. 이에 종사하는 하역업 종사자수만도 1만명을 넘어섰다. 한달동안 뿌려지는 노임도 무려 1억여원이나 됐다고 한다. 그래서 노임을 주는 날이면 주변 시장과 상가는 물론 대포집들이 호황을 누렸다. 이처럼 하역업계의 경기가 아주 좋아지자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까지 들끓어 하역업체는 난립양상을 띠기도 했다. 또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하역업체들간에 외자 작업권을 따기 위한 암투가 벌어지는 등 하역업계의 갈등과 반목은 사회문제로 떠오를 정도로 심각했다.

이런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인천항에 입항할 예정이던 외항선들이 부산 등 다른 항구로 회항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인천상공회의소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난립한 하역업체들을 규합, 1949년 6월 인천항만하역협의회를 만들었다. 이후 하역업체는 자율정화됐으나 이 과정에서 밀린 노임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반발사태가 벌어지는 등 매우 어수선했다. 인천에서 발행되던 대중일보(1949년 10월 8일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전한다.

“항만 노무자들이 최대의 희망을 걸고 있는 외자입동량은 요즘 격동일로에 있다. 시끄럽던 업체 통합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한고비를 넘겼다고 볼 수 있는 이 때에 외자입하 물동량이 크게 떨어져 걱정이다….”

하역업협회 탄생으로 난립양상은 진정됐으나 노무자의 임금체불이 사회문제화됐고 여기에 물동량마저 줄어 하역업계가 더 이상 활황기를 타지 못했다는 게 대중일보에 비친 그 무렵 하역업계의 현실.

인천엔 이같은 혼란기를 거쳐 현재 24개 하역업체와 1백여개 창고가 남아 맥을 이어가고 있다. 李起祥 인천항만하역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