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에게 친근한 인천기독병원(중구 율목동)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제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을 일찍 접했던 인천은 의료부문에서도 상대적으로 빨리 '혜택'을 받았다.
개항을 전후한 인천의 서양식 의료기관을 개괄하면 이렇다. 일본은 1882년 영사관을 설치한 후 그 안에 부속의원을 두었다가 1906년 지금의 인성초등학교 자리에 병원을 신축, 인천부립병원의 문을 연다. 그러나 부립병원은 주로 일본인과 외국인들을 상대로 진료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서민들이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1890년 성공회가 중구 내동에 성루카병원을 개설했다. 이 곳에선 미국인 원장 랜디스 박사가 서민들을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벌였지만 1916년 병원문을 닫았다. 이밖에 몇몇 일본인들이 병원을 운영했지만 진료비가 워낙 비싸 일부 부유층만 이용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미국인 선교사들이 1932년 율목동 237 70여평 부지에 미선교부 진료소를 세운 게 인천기독병원의 효시였다. 일제 말기엔 주로 술집 접대부들의 검진소로 사용되면서 '부인병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 후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이 진료소는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기독교 감리교단은 전쟁 통에 부상을 당하는 사람들이 늘자 1950년 11월 총회를 열어 인천에 병원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당시 감리교단의 유형기 감독과 사회국 문창모 위원장, 김응태, 조영제, 김광우, 강치안, 박완규, 김청환 등이 병원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 미국인 선교사 사우어(Sauer. I. Chales) 부자와 빌링슬리(Billingsley Alice Magaret) 등 11명의 선교사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2년 5월 26일 문을 연 기독병원은 그러나 개원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병원건물이 워낙 낡은데다 전쟁중이어서 의료기자재와 약품 등을 구하지 못해 진료에 애를 먹었던 것.
강석봉 초대 인천기독병원장은 '기독병원 40년사'에서 그 무렵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병원이 의료기자재와 약품을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총리원에서 1천만환의 지원금과 독지가로부터 빌린 1천1백50만환을 지원했다.” 당시 쌀 한가마니에 80만환이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5천여만원에 달하는 셈.
'인천 한세기'의 저자 신태범박사(81)는 개원 모습을 회고하며 “병원 정문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인천 기독병원'이라는 간판과 '북한 피난민 연합회 진료소'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말했다. 피난민 연합회 진료소는 전쟁으로 피란한 기독교 신자로 구성된 의료진들이 부상자 진료를 도우면서 간판을 함께 내걸었다.
개원의사는 여의사 1명 등 3명이었다. 내과엔 나신애박사(여)가 담당했고 외과엔 황인표 박사, 이비인후과엔 강석봉 박사(초대 원장)가 맡았다. 53년 가을 선교부에서 30㎜ X선 기계를 기증받았고 이듬해엔 일제때 기숙사로 쓰던 목조 단층집을 수리해 입원실로 사용, 25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게 됐다. 63년에는 3백50평 규모의 3층 건물을 지어 외래부를 이전하고 2층은 수술실과 산원, 3층은 입원실로 쓰면서 종합병원으로서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기독병원이 공헌한 일중에는 간질환자의 치료에 앞장선 것을 꼽을 수 있다. 65년 기독병원 의료 선교사로 근무하던 로빈슨(Robinson) 박사의 제의로 간질환자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순회진료 뿐만 아니라 매달 한번씩 병원에서 '간질환자 진료의 날'을 운영하기도 했다.
순회진료팀의 이름도 친근감을 주기 위해 '장미회'로 정했다.
처음 14명으로 시작된 장미회 소문이 퍼지면서 대구 서울 목포 춘천 등 전국에서 회원들이 모였고, 이동진료반도 꾸리게 됐다.
이후 전국 보건소, 진료소, 고아원 등에 1백56개 장미회가 구성돼 수많은 간질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다. 65년부터 61명의 간질환자 치료를 시작한 인천에선 90년까지 8만여명이 치료를 받았으며, 봉사자들을 포함해 의료진만 해도 전국적으로 95만여명에 달했다. 인천기독병원에선 61년에만 6만9천여명의 일반환자 중 1만2천여명이 무료로 진료를 받았을 만큼 서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았다.
기독병원이 인천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일은 의료보조 인력 육성사업이다.
60년대부터 갑자기 늘어난 간호사의 해외진출로 극심한 간호사 부족현상을 빚었다. 이런 이유로 생겨난 것이 바로 인천간호전문학교다. 71년 학교법인 새빛학원이 승인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73년 3월 인천간호전문학교에서 40명의 신입생을 선발했다. 이어 78년 12월 인천간호전문대학으로 승격한 남동구 간석동에 교사를 신축했다. 81년에 인천간호전문대학으로 변경되면서 입학생은 5백60명으로 늘었다. 지금은 경기도 안산으로 자리를 옮겨 이름도 안산대학으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68]인천기독병원
입력 2000-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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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2-12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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