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74,인천 감옥분감과 구치소)
인천지역에 '근대식' 감옥이 생겨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극성을 부리던 무렵이다. 일제가 1908년 경성감옥 설치와 함께 감옥분감(監獄分監) 설치령을 제정한데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1909년 2월 16일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 건물을 인계받아 경성감옥 인천분감이 전국 처음으로 설치됐다. 인천분감을 시작으로 부산, 전주, 의주, 춘천, 원산, 청주 등 전국 8개 도시에도 감옥분감이 들어섰다.
인천감옥은 백범 김구선생이 수감됐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914년 일본 군인을 살해한 일명 '치하포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인천감옥으로 이감된 백범은 당시 항만축조공사 등에 강제노역을 당한 뒤 같은 해 7월 가석방됐다. 김구선생은 이에 앞서 1897년에도 민비를 시해한 일본 육군 중위를 때려 죽인 혐의로 해주감옥에 수감, 모진 고문을 당하다 인천감리영(監理營)으로 옮겨져 사형이 확정됐다가 탈옥하는 등 인천에서 두차례나 옥고를 치른 것으로 문헌은 전하고 있다.
인천분감은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쳐 1923년 3월 폐지된다. 그리고 분감건물은 인천구호원(仁川救護院)과 갱생보호소(更生保護所)로 사용됐다. 1924년부터 1934년까지 구호원과 갱생보호소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선 전해오는 문헌이나 이야기가 없어 아쉽다.
이후 1935년 조선총독부 법무국 행형과 石部武一 사무관은 인천지역에 형무소 건축을 결정하고 형무소 자리를 찾아 나선다. 당시 풍수지리와 지형·지물 등을 중시했던 일본은 형무소 자리를 선정하는데 꽤 고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소년형무소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인천 중심지에서 동남쪽 6km 지점에 있는 옛 백제의 미추홀 도읍지 문학산 기슭에 형무소 자리를 택했다고 한다. 이 곳은 청동기시대 북방식 탁상형(卓床型) 고인돌과 남방식 가반형(架盤型) 고인돌 문화가 합류한 지석묘지대로 유명하다. 지금도 인천구치소(보안과)에 고인돌 하나가 보존되어 있을 정도. 아울러 고려 11대 문종의 4째 왕자 의천대각국사가 여기서 태어나 31대 공민왕 10년 재침입한 홍건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지금도 구치소 3백m 지점엔 그 때 말 무덤이 남아 있다고 소년형무소사는 기록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구치소 자리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학이 날개 안에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이 곳에서 유명한 애국자가 나오거나 대식구가 살 수 있는 집터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결국 이곳엔 정말 '큰 집'이 들어서게 됐다.
일제는 이런 풍수지리 등을 근거로 1935년 10월부터 인천부 학익정 137번지(지금의 학익동 278 일대)에 건축공사에 들어가 1938년 3월 31일 재소자 수용에 필요한 소년형무소 시설을 갖췄다. 초대소장엔 일본인 內山隆治가 임명됐으며,수용구분은 법무국장이 관장했다. 여기선 전국 각 법원에서 판결확정한 만 18세 미만(소학교 3년 정도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으로 초범에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소년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수용된 인원 등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수용자 8백여명이 가출옥 또는 형집행정지로 모두 풀려났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과 더불어 이 소년형무소는 미 군정청 사법부가 관할하면서 일본인 직원 50여명을 면직하고 한국인 직원에 대해선 각자 희망에 따라 공주 3명, 군산 3명, 안동 3명, 전주 1명, 경성형무소에 40명을 전근발령했다. 2년뒤인 1947년 8월엔 미군한테 모든 시설을 넘겨받아 인천소년형무소로 개청하고 초대 소장에 한기만(韓奇滿)씨가 부임하게 된다. 그 때 직원은 60여명으로 김천소년형무소로부터 소년수형자 2백명을 넘겨받아 관리했으며, 주로 대구고등법원 관할 각 법원에서 판결확정된 소년수형자를 수용했다.
그러던중 정부수립 1년이 지난 1949년 9월 인천소년형무소는 불순조직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 당시는 전국 도처에서 좌익계열의 파괴활동이 멈추지 않는 등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울 때였다. 이 와중에 인천소년형무소에서 간수장(看守長) 박찬조를 중심으로 직원들을 포섭하고 불순조직을 확대하려는 일명 인천형무소 세포회(細胞會)사건이 터져 직원 60명이 해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채 마무리되기 전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처럼 일제시대와 광복, 그리고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을 맞은 인천소년형무소(당시 경기도 인천시 학익동 283)엔 직원 126명이 1천300여명의 소년 수용자들을 맡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여·순 반란사건에 관련되어 형을 선고받은 2백여명의 소년수용자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국교정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인천소년형무소는 소년교도소로 개칭됐다가 1990년 소년범 교도역할을 끝내고 미결수를 수용하는 구치소로 바뀌어 오늘에 이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74]구치소
입력 2000-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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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3-0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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