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상수도시설에 대한 첫 기록은 1905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역인사 40여명이 물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 급수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처음엔 문학산계곡에 1일 1인당 38ℓ를 1만4천여명의 주민에게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규모가 너무 작아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후 같은해 8월 당시 내무성 기사로 근무했던 일본인 나까시마(中島)박사가 서울 노량진에 수원지를 설치, 인천 일대에 급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상수도매설공사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자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정부에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 흥업은행에서 1천만원을 차입하라고 권유, 이 차관으로 경기도에 수도국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듬해 8월 10일 인천 이사청과 신부이사관에 수도철관매설공사를 위한 공문을 하달, 11월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1910년 9월에 준공, 12월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관리는 인천부에서 맡았다.

인천수도 철관매설공사에 사용된 관은 직경 20인치 크기의 주철관으로 30.8㎞ 구간을 통해 인천 송현동 배수지(수도국산)로 물을 보낸 뒤 각급 기관과 가정으로 공급됐다. 이후 김포에 비행장이 건설되고, 부평지역에 공업용지와 일제 조병창이 조성되자 이들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인천송수관은 분기급수를 시작했다. 결국 조병창 등에 엄청난 양의 물을 보내다 보니 급수량이 달려 주민들은 물부족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어 해방과 더불어 국제공항으로 발전한 김포공항, 연합군이 집단으로 주둔한 부평 조병창지구, 대형선박이 수시로 정박하는 인천항 등으로 인해 물부족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일반 시민들에겐 격일제로 급수를 제한했다.

해결책 마련이 시급해지자 당국은 인천~부평간 500㎜ 송수관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계획으로 부평펌프장 가압능력을 1일 1만6천입방미터에서 2만4천입방미터로 늘리기 위해 170마력 펌프 3대를 증설했다. 또한 노량진에서 부평까지 900㎜ 기존 송수관을 활용하기 위한 보수공사에 들어갔지만 낭패의 연속이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장거리 대형 흄관을 통해 송수한 결과, 노량진~영등포 구간 국도에서 대형차의 왕래로 인한 접합구 파열이 속출했다.
영등포에서 부평까지는 지반이 연약한 논과 밭을 지났는데, 기초공사없이 관을 포설하는 바람에 수압이 가중될 때마다 침하로 인해 접합구가 파열, 물공급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6.25를 겪으면서 상수도 시설도 전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1951년 수복과 함께 인천이 주요 군사전력 지역으로 떠오르면서 작전수행을 위해 인천의 상수도는 초긴급상황으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당시 군당국과 각 원조기관들이 나서 500㎜ 송수관과 수원지를 복구, 수리하고 그해 9월부터 급수를 재개했다. 아울러 원조물자와 은행의 장기 기채자금으로 900㎜ 송수관 보강 및 수리공사를 추진해 1953년엔 송수관을 전쟁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당시 인천시 인구 7만명으로 추산해 시설한 900㎜ 송수관과 수원지의 기존시설로는 전쟁 후 급증하는 인구와 각종 시설물에 물을 공급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1953년 9월 부평 갈산동 현 부평배수지에 인구 60만명까지 급수가 가능한 수원지를 만들게 됐다. 하지만 협조기관인 경제협력기구에서 김포비행장에 급수를 하지 못하는 수원지 공사에 차관을 줄 수 없다고 반대를 하는 바람에 1956년 4월 김포군 양동면 신당리로 장소를 바꿔 공사를 벌였다. 수원지 완공은 1959년 10월.

이같은 수원지 확장사업에도 불구 인천시는 여전히 물부족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업이 외국차관의 도입이었다. 그래서 사업비를 조달할 방법으로 AID(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한 국제개발처), 세계은행 등과 잇따라 협의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상수도 확장사업 시기를 잃을 것을 우려한 인천시는 재정융자 1억7천600만원, 시비 6천500만원을 확보해 1967년 4월 부평정수장 부지내에 3곳의 침전지를, 수봉산에 1만입방미터 규모의 배수지 축조공사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후 인천시는 유일한 자체 취수장인 가양취수장을 1963년 2월에 착공하고, 1985년엔 급증하는 부평정수장의 용수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노온정수장을 신설했다. 아울러 남동공단 및 연수택지 개발사업지구에 안정적으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연수배수지를 건설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어 인천시 수도국은 89년 9월 1일 상수도사업본부로 발족했고, 남동 및 공촌정수장을 비롯한 배수지, 취수장 설치 등의 공사를 집중적으로 벌여 다른 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이 부족했던 인천시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박래원씨(74·남구 학익 1동)는 “40년대 후반 격일제로 물을 공급할 무렵 일반 시민들은 물론 소규모 공장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