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85,요리집과 권번(券番))
개항 이후 인천의 대중음식문화는 일본인과 청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다. 한동안 이들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서울보다는 인천 개항장에서 더 많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청관거리의 중국음식점과 함께 이렇다 할 일본식 '요리집'이 인천에 가장 먼저 상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개항 초창기만 해도 인천의 음식점이라곤 주막과 목로술집, 국밥집, 색주가집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외국인들이 급격하게 늘면서 대형 전통 한식집과 일본 요리집, 중국음식점 등이 앞다퉈 들어서 음식문화를 이끌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요리집은 기녀(妓女)를 접대부로 고용, 술과 음식을 내놓는 형태로 우리 술집문화와는 아주 달랐다. 당시 일본인들은 '어요리(御料理)'란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요리집'이라고 불렀는데, 요리는 일본어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 또는 '마련된 음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외래어인 셈.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끌었던 대표적 일본 요리집으론 청일전쟁 이후 중구 관동의 일산루(一山樓), 조일루(朝日樓), 신생동의 팔판루(八阪樓) 등이 꼽혔다. 이어 일본 요리집이 속속 들어서 정착하면서 술과 음식, 예기(藝妓)는 대개 요리집에서 맡게 됐다. 이 때 예기를 관리하던 권번(券番)을 설치하고 1902년엔 공창격인 유곽을 허가했다. 권번이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리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권번에선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명단을 요리집에 보내 단골손님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부를 수 있게 했다. 물론 예약도 가능했다. 신입기생은 권번에서 채용했다. 인물이나 태도, 가무, 서화 등을 심사해 채용했으나 여자아이를 기생으로 양성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10년을 전후해 중구 용동에 용동권번과 용금루(湧金樓·조선각 전신), 화월관(花月館), 신흥관(新興館) 등이 성업을 이뤘다. 지금도 용동 마루턱에서 신신예식장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이 일대가 권번지역이었음을 알리는 문구가 남아 있다.
1931년 통계를 보면 일본 요리집 8개소, 한국 요리집 3개소, 일본 예기 33명, 한국 기생 7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국인이 5만여명, 일본인이 1만여명 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의 경제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 당시 요리집에선 신선로, 찜, 구이, 마른안주를 곁들인 기본 주안상을 3원 가량 받았으며 기생 화대는 1시간에 1원 정도 했다. 술은 약주나 일본 정종이 주류를 이뤘다. 요리집 초창기엔 장고와 가야금을 갖고 시조나 수심가, 남도소리로 흥을 돋구었는데, 1930년대 후반부터는 축음기로 유행가를 들려주거나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는 유행이 일기 시작했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신태범박사(80)에 따르면 권번마다 시풍의 일본어 선전문구와 함께 기생명단을 적어 내걸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소성권번의 선전문구는 이렇다. “예도(藝道) 발달의 중임을 맡고 수련을 거듭하기를 그 몇 성상(星霜)이던가. 이제 예도의 자신이 가슴에 가득 찬, 꽃 같은 기생(妓生)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1930년대 들어 점차 일인들의 무대가 서울로 옮겨가면서 인천의 음식점도 변화를 맞게 된다. 1차 세계대전 특수에 편승, 많은 나라들이 호황을 누리면서 맥주와 양주, 간단한 서양음식을 내놓던 '카후에'란 서양식 음식점들이 속속 선을 보이며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카후에는 파리의 카페(Cafe)를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 것으로 여급(女給)이라는 접대부가 시중을 들었다.
카후에 붐이 일어난 1930년대 초 카후에로 이름을 날린 곳은 지금의 신포동 '청실홍실' 모밀국수집에 위치했던 금파(金波)였다. 벽돌 양식의 3층 양옥집 금파는 부사(富士), 일화루(日華樓)와 함께 해방 전까지 서울에까지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또 그 무렵 대표적인 서양음식점으론 자유공원 인근의 인천각이 유명했다. 1905년에 지은 영국인 존스톤씨의 별장을 1936년 일본인이 매입해 호텔겸 레스토랑으로 운영했다. 인천각은 인천서 제일로 꼽히던 양관(洋館)으로 130평 규모에 4층 석조건물이었다. 중세 독일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장엄하면서도 우아한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
이어 1940년대로 접어들자 복어와 장어 요리를 전문으로 하던 삼목원(三木園), 삼복(三福), 희락(喜樂) 등이 생기고 대중음식점인 귀옥(龜屋), 오무야 같은 식당도 등장했다. 귀옥은 점포를 신축해 간판을 성금(成金)으로, 해방 후엔 화선장(花仙莊)으로 이름을 바꿨다. 고급 일식집으로 꼽혔던 화선장은 1970년대 말까지 중앙정부의 고급관료와 유명인사들이 드나들던 곳으로, 특히 신선한 회와 화식(火食)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5]요리집과 권번
입력 2000-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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