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자동차 사태'가 인천은 물론 전국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공기업화 요구에 나선 노동계는 올들어 투쟁의 강도를 더욱 높이며 노동자 권익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노동계의 움직임은 곧 인천 노동운동의 현 주소를 가늠케 하는 지표로도 인식된다. 노동계에선 “대우자동차의 처리방향이 인천 노동운동의 성숙, 또는 퇴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항만하역과 공업도시로 대표되는 인천은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오늘날까지 이처럼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래서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천을 아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일제 압제에서 풀린 1945년 한국의 노동운동은 조합원수 55만명을 자랑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끌고 나갔다. 전평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지역이 바로 인천이었는데, 부두노동자가 많고 일찌감치 일제시대부터 산업체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일제때 조선노동당 재건조직 인천책임자인 이승엽은 인천노동조합의 '적색노조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전평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천의 조직장악에 신경을 썼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사건이 바로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직(주)의 파업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은 해고자 복직과 종업후 외출자유, 8시간 노동제 등을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나중엔 결국 美 군정의 무장력투입과 다른 노동자 및 시민들의 인천시청 농성합류로 이어지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훗날 “전평을 와해하고 대한노총을 대안으로 내세우려는 군정측 음모에 맞섰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전평외에 소위 '우익노조'의 활동도 활발했다. 1945년 10월 율목동에선 '인천자유노조'(조합장·임귀섭)가 태동했으며, 곧 대한노총 분회, 대한노총 인천지구연맹으로 연결됐다. 인천 노동운동의 연륜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항운노조도 이 때 닻을 올렸다. 46년 3월 태어난 항운노조는 인천부두노조(50년), 인천항만자유노조(58년), 전국부두노조 인천지부(61년)을 거쳐 지난 1981년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4.19 혁명 때까지 부두노동자의 임금인상투쟁 외에 큰 변화를 보이지 않던 인천의 노동운동은 5.16 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의 한국노총 재편움직임에 맞서 기성노조 탈퇴와 제2노조건설 등을 통해 대응했다.
해방후 인천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역시 70-80년대다. 민주노조 건설 바람을 타고 60년대에 섬유와 화학, 전자 등 경공업 분야서 '자양분'을 다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곧바로 한국여성노동운동사로 받아들여질 정도다. 이 때 꼭 언급되는 게 그 유명한 동일방직(동구 만석동)의 '똥물투척사건'. 1976년부터 무려 4년간 계속된 동일방직 투쟁에서 사측의 노조무력화 시도와 기관의 탄압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은 피 눈물을 뿌려야 했다.
1978년 2월엔 재차 노조와해를 꾀한 사측에서 여성조합원들 몸에 닥치는 대로 인분을 뿌렸는데, 김수환(金壽煥)추기경까지 정부에 항의할 정도였다. 독재정권 시절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운동에 헌신적인 인물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모(代母)'로 불린 조화순목사(70)를 비롯, 동일방직 노조 3대 지부장으로 활동한 이총각씨(여·55·인천노동연구원 원장) 등이 바로 그들.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와중에도 인천의 노동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84년에는 대한마이크로 노동자들이 서울보다 앞서 노조를 만들었으며 경동산업, 동보전기, 한일스테인레스가 그 뒤를 이었다. 80년대에 성숙한 인천의 노동운동은 소위 '학출'로 불렸던 대학생출신 노동자들이 현장학습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노동 및 시민운동단체서 활동하거나 정계로 진출한 '386세대' 상당수가 이 시기 수배의 눈을 피해 위장취업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아울러 인천은 '노동자문학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했다.
90년대 들어 인천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조단결이란 구심아래 88년 결성된 인노협의 맥을 이은 인천지역노조대표자협의회가 94년 10월에 출범했으며 96년 1월 민주노총 인천본부로 이어져 현재 4기체제로 염성태씨(55·대우중공업노조위원장)가 본부장을 맡고 있다. 민노총은 지난 61년 꾸려진 한국노총 인천본부와 함께 인천 노동운동을 양분하고 있는 셈이다.
인천의 제조업 노동자는 40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80년대와 비교할 때 현격하게 떨어진 조직률의 복원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인천노동연구원 김종수상담실장(37)은 “80년대 후반 무렵 10만여명에 이르던 조직이 지금은 5만~6만 수준에 머물고 있다”며 “대기업의 조직률은 80~90%가량 되지만 중소사업장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6]인천의 노동운동
입력 2000-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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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0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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