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철강회사의 연대기 역시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인천 등 항만을 중심으로 철강생산기지를 구축, 군수물자 조달 등에 나서면서 철강산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해방 당시 남한에 남은 철강회사는 가네부치공업이라고 불리던 인천의 종연공업(鍾淵工業)과 강원도 삼척의 시천(是川-고레카와)제철 등 두 곳. 종연공업은 1938년 1월 일본의 이연콘체른이 인천시 동구 송현동 1의 11 해안지역에 설립한 조선이연금속의 후신이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물자 수송난에 봉착한 일본이 이듬해 12월 조선이연금속을 종연실업에 양도하면서 종연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종연공업은 그러나 일본이 패망할 무렵 자금압박으로 설비와 기자재 등의 도입이 지연되면서 시스템 구축에 실패하고 말았다.
광복 후 종연공업엔 현장직 사원 몇 명만 있었을 뿐, 철강산업의 기술을 체득한 한국인은 없었다. 한국인에게 기술이전을 회피한 일본의 정책 때문에 한국인 고급기술자가 있을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다 1945년 8월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종연공업의 재산이 국가에 귀속, 회사명이 대한중공업공사(인천제철의 전신)로 바뀌었고, 상공부 직할공장으로 운영됐다.
그 때 종연공업 인천공장에서 간부로 일했던 이강우란 사람이 각계 인사를 찾아다니며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적극 알렸다고 한다. 그는 대한중공업공사를 정부지원을 받는 국영기업체의 모태로 삼아야 한다는 점과 인천에 철강산업체계를 세워야 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이승만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특별지시를 내리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면 국가부흥사업을 펼쳐야 하는데, 우선 그 기초인 철강소재의 공급을 위해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며 대한중공업공사에 제강시설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외화지원이 아닌, 전액 국고지원으로 평로공장 시설비 5천900만환을 투자하고 평로공장 시설비로 1억200만환을 융자했다. 또한 대한중공업공사의 관리인제를 폐지하고, 이사관리제를 도입해 1953년 5월 15일자로 초대이사진을 임명하면서 국영기업체로 출발했다.
1957년 대한중공업공사에 입사한 정해영씨(65·인천제철동우회 부회장·철우기업 대표이사)는 “당시 철강공업 기술력이 부족해 북쪽 진남포조선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기술자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며 “그 땐 워낙 직장구하기가 힘들어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배경의 사람들이 인천에 올라와 현장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중구 용동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공장이 생겼다는 소문으로 '방석집'이 우후죽숙격으로 생겨났는데, 무려 80여 곳이 성황을 이뤘다. 대한중공업공사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직원들에게 회사이름이 달린 유니폼을 입혔는데, 이 옷을 입고 용동에 나가면 외상 술을 줬고 쌀도 외상구입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신분보장'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중공업공사는 그 후 1954년 6월 제강·압연공장의 건설을 위해 서독 데마그사를 국제경쟁입찰을 통해 선정하면서 국내 철강산업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철강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정부의 투자로 대한중공업공사는 1954년말 평로강괴 3만6천t, 중형제품 3만6천t, 박판제품 5천t의 생산규모를 갖췄다. 이어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겪으면서 '혁명정부'가 대한중공업공사에 현역군인을 이사장으로 내려보냈고, 그 해 9월 25일엔 회사명을 인천중공업주식회사로 바꾸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 때 연간생산능력 1만2천t 규모의 소형압연공장을 건설했으며, 중형압연을 비롯해 다양한 제품을 내놓게 됐다.
이러한 노력은 산소부화제강(산소를 이용한 철강생산 기술)으로 이어지고 'ㄱ형강', 'ㄷ형강'의 개발과 함께 KS표시 허가를 취득하는 등 급속한 기술발전을 가져왔다. 이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에 따라 종합제철소 건립이 핵심산업으로 부각되면서 인천중공업의 민영화 요구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철강업계는 정부시책과 상황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회사를 구축하려는 활동에 들어가고, 1964년 10월 10일 창립총회가 열리면서 인천제철(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인천제철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긴축재정과, 출자전환, 시설합리화 등의 노력을 통해 30만t의 철강재 공급능력을 갖춘 대형회사로 거듭난다.
이어 정부가 1978년 인천제철의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자 국내 대기업들이 인천제철 인수경쟁에 나섰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이 5월 10일 재입찰을 통해 인천제철을 인수하면서 '종합철강회사'로 탈바꿈을 시도, 오늘에 이르게 됐다. 인천제철은 1981년 2월 수입에 의존하던 대형 H형강을 생산하는 공장건설에 들어간 뒤 '1억달러 수출탑'을 수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7]일제수탈서 비롯한 국내 철강역사
입력 2000-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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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0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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