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 3월 1일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교육발전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30여년간 인천 지역사회에 파행과 분규의 대명사로 인식되던 선인학원 산하 14개 학교가 한꺼번에 시립대학과 공립 중·고등학교로 탈바꿈 한 것이다. 이같은 선인학원의 시립화는 숱한 희생을 감수하며 전개한 눈물겨운 학생들의 투쟁과 불의에 대항했던 교수·교사·직원들의 용기, 고장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시민들의 의지가 일궈낸 합작품이었다.

선인학원의 역사는 멀리 40년대 '성광학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천에는 성광중학교(47년 설립)와 성광상업고등학교(54년 설립)를 운영하는 '성광학원'이란 조그마한 사학재단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심각한 운영난을 겪게 됐다. 이 학원을 인수한 이가 바로 현역 육군장성인 백인엽씨. 그는 58년 7월 이 학원을 인수한 뒤 65년 3월에 학교법인의 명칭을 '선인학원'으로 바꾸고 산하 학교의 교명도 형제·가족의 이름에서 따다 붙였다. '선인학원'이란 명칭은 백씨의 형 선엽씨의 선자와 자기 이름의 인자를 합쳐 지은 것이었다. 산하학교에도 선엽씨의 호인 '운산'을 비롯 백인엽씨 호인 '운봉', 어머니의 이름 '효열', 아들의 이름 '진흥' 등을 교명으로 채택했다.

선인학원은 출범과 함께 국내 사학 발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그러나 이런 양적 성장의 이면에선 선인학원의 파행과 비리에서 비롯된 '인천 교육의 불행'이 자라고 있었다. '선인학원시립화성공사'(96년 3월 1일 발행) 등에 따르면 선인학원의 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군사 정권의 보호 아래 대외적으로는 인근 주민들의 재산권을 불법적으로 침해하는가 하면 치외법권적인 횡포를 일삼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례로 학교부지 확장을 위해 도화동 언덕 위에 있던 중국인들의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기도 했는데, 이 사건은 한·중 양국간에 심각한 외교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백씨의 학원운영 행태 또한 상식을 뛰어넘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장, 교직원 가릴 것 없이 당일로 해고시키는가 하면, 교사들에게는 교대로 예비군복을 입혀 교문 앞에서 보초를 서게 하거나 순시를 돌게 했다. 이같은 파행과 비리에도 불구 선인학원의 양적 팽창이 가능했던 것은 조직적인 부정입학과 편입학, 그리고 졸업장 판매 행위가 난무했기 때문이었다. 편입생의 모집은 재단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 일정 수준의 기부금만 내면 어느 때건 아무에게나 편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심지어 인가도 나지 않은 학과에 학생을 모집한 뒤 졸업장을 줘 학생이 입학한 학과와 졸업장에 나타난 학과명이 다른 사례도 있었다. 또 전혀 학교를 다녀보지 않은 사람들도 일정액의 기부금만 내면 졸업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국이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분위기에 휩싸였던 80년대 초 선인학원에서도 투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해 3월22일 운봉공고, 운산기계공고, 항도실고 등 세 학교 학생 1천500여명이 수업을 거부한 채 교내 운동장에서 백인엽 축출, 교내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다 70여명의 학생들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태는 인천대와 인천전문대학내시위에 이어 전문대에 대한 임시휴강조치 등으로 확산됐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 문교부가 선인학원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감사결과 숱한 부정과 비리의 실상이 하나 하나 벗겨지면서 백씨는 3월 22일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하지만 백씨는 출소후 선인학원을 배후에서 조종하다 86년 선인학원 '건설본부 자문위원' 이란 직책으로 선인학원에 복귀한 후 선인학원의 주인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백씨 복귀후 선인학원의 파행이 재연되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그해 10월 14일 전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학원 정상화투쟁을 계기로 학내분규가 확산되면서 국내 교육사상 학내분규를 이유로 한 최초의 휴교령(81년 10월 31)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5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4명의 교수가 징계위에 회부됐으며, 10여명의 학생들에겐 무기정학 처분이 내려짐과 동시에 백씨는 두번째 퇴진을 맞게 됐다. 당시 전문대 체육학부 학생들은 시위진압 및 저지를 위해 동원되곤 했는데, 그 때문에 학내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백씨의 재단복귀 문제를 계기로 교수들은 88년 교수협의회를 발족하고, 항도실업고등학교 등 6개교 교사들은 교사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90년대 들어선 '범선인학원 정상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정상화 투쟁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교협 교수들의 철야농성 등 학내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