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2월 27일 오후 1시 50분께 대법원 대법정. 김갑수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판결주문을 읽었다. “피고인 조봉암을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전세룡, 이상두는 각각 징역 2년에 처한다.”
침묵을 깨고 몇 명인가 대성통곡을 한 다음에도 방청석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변호인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온 국민의 주목을 받았던 진보당사건 재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뜻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벌어졌지만 소용없었다. 재심청구마저 기각당한 채 사형도 일사천리로 집행됐다. 그 해 7월 31일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예순의 나이로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분명 굵었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일각에선 진보당사건을 '권부가 저지른 사법살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수십년동안 역사의 진실은 묻혀진 채, 이데올로기의 올가미를 쓰고 간첩죄로 숨진 조봉암이란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다.
이승만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정치거목' 죽산의 고향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다. 지난해 11월 강화문예회관 대강당에선 죽산 탄신 100주년과 서거 40주년을 맞아 추모사업회 주비위원회가 마련한 기념강연회가 열렸다. '한국정치사에서 본 죽산 조봉암선생의 위상', '죽산은 간첩이었나', '농지개혁법안의 마련과 죽산'이란 주제로 강연이 진행됐다. 이에 앞서 10월에는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이란 다큐멘터리가 방송됐다. 전향 남파간첩으로 사건수사에 참여했던 한승격씨는 인터뷰에서 “진보당의 정강정책이 북한과 일치한다는 혐의는 억지”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하기도 했다. 7월에는 '한국현대사와 조봉암 노선'이란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으며, 그의 일제시대 독립운동행적과 해방 이후 정치활동을 담은 전집 6권이 출간됐다. 죽산의 사면과 복권 청원에도 여야 정계인사들의 서명이 줄을 이었다. 모두 죽산의 대중적 복권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이런 움직임이 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단상황 속에서 인천이 낳은 한 정치인의 비극적 퇴출과정이 부정한 음모로 뒤틀려졌음을 밝혀내고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식의 발로라는 접근이 타당할 터이다. '조봉암 연구'라는 논문을 쓴 바 있는 서울대 국사학과 박태균강사는 '조봉암과 인천'이라는 글에서 “서울의 관문인 인천에선 일제의 탄압과 통제가 매우 심했다”며 “이러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인천에선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배출됐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조봉암”이라고 정리했다. 죽산의 사상과 정치노선 형성, 그리고 변화를 겪었던 지역이 바로 인천이었던 셈.
특히 오늘날 인천이 중앙정치의 무대에서 밀려나게 된 결정적 분기점이 '죽산거세'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게 많은 인천인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아는 것 역시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읽는 지표일 수 있겠다.
죽산은 중국내 조선인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2차례에 걸친 대통령후보, 진보당 당수라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마쳤으나 가난한 집안사정 탓에 학업을 계속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던 죽산의 삶에 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3.1운동 참가였다. 당시 21세였던 죽산은 1년간의 투옥기간 중 완전히 새롭게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이후 일본 동경유학생활을 통해 민족수탈과 제국주의 침탈과정을 체계적으로 익히면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했으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8년여간 옥살이를 했다. 해방후 인천에서 미강조합장, 실업대책위원회 대표, 지금의 시장격인 인천부윤선거 출마,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지부의장 등을 지내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렇게 인천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으로 자리를 굳힌 죽산은 1948년 6월 23일 전향성명서를 통해 사회주의의 청산을 알린다. 정치노선에서 좌와 우를 모두 지양하는 중립적 입장도 취했으며, 비타협적 투쟁 및 혁명의 방법이 아니라 타협을 통해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당시 그의 전향은 큰 반향을 불렀다. 인천의 대중일보는 1면 머릿기사로 '좌익진영 대난조-조씨 공산당 불원 성명'으로 특필하기도 했다. 언론인 이영석씨는 '조봉암, 누가 그를 죽였는가?'란 저서를 통해 “당시 죽산은 공산당에서의 이탈을 확인한 후 '3천만 동포에게 고함', '공산주의 모순 발견'이란 소책자를 통해 공산당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했다”고 썼다. 죽산의 인생에서 가장 큰 반전으로 기록될 사건이었다.
그는 1946년말부터 1947년초까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정치노선의 실험에 나선다. 그리고 1948년 4월 1대 국회의원선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2]죽산조봉암(上)
입력 2000-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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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3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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