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개원한 제헌의회엔 무소속이 85석이나 됐다. 죽산은 이들 중 소장파 72명을 결합해 무소속구락부(無所屬俱樂部)를 만들었다. 남북통일과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행동통일을 도모하고 균등사회 건설에 매진한다는 게 취지다. 언론인 이영석씨는 “미 군정은 당시 정보보고서를 통해 죽산을 무소속의 리더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죽산은 제헌의회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국민경제의 균형발전, 생활의 기본수요 보장, 토지개혁 등 경제조항을 포함하기 위해 노력했다.
죽산은 초대내각서 농림장관을 맡았다. 그의 이력상 파격인사로 분류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엔 “이승만(李承晩)정권이 자신들의 민주성을 부각하기 위해 미 대사관과의 타협속에서 이뤄진 것”(박태균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이란 추측과 농정개혁에 대한 죽산의 기대, 한민당 견제 등 설이 분분하다. 어쨌든 죽산은 농림장관시절 숙명적인 토지수탈 관행에 메스를 들이대는데 주력했다. 농민이 부담없이 농토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토지개혁법을 농지국 주관 아래 성안하도록 독려했다. 반대를 누르고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농민의 권익을 지켜줄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동조합법과 농민신문도 이 때 선을 보였다. 죽산이 그 짧은 6개월동안 이룩한 농림정책은 “민초들이 처음 땅을 갖게 됐다”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농민들에게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위협을 느끼는 세력도 많아 견제가 몹시 심했다. 결국 죽산은 직권남용과 부당한 예산집행으로 몰려 장관자리서 물러난다.
1950년 5월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서 죽산은 별다른 지역구활동이 없었는데도 중앙정치무대 활약상에 힘입어 인천 병구서 여러 경합자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죽산은 이후 2대 국회에서 두번이나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죽산은 “대통령은 조금도 생각이 없다. 그러나 명색이 민주국가에서 이승만대통령과 경쟁할 사람조차 없다면 국민이 불쌍하다…(중략) 이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대변하기 위해 후보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관권에 쫓겨 연설회조차 제대로 못한데다, 투·개표도 엉망인 이 선거에서 죽산은 이대통령(523만표)에 이어 79만9천표로 2위를 했다. 죽산이 정권에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 계기였다. 이후 그는 탄압의 어두운 터널로 들어서게 된다.
1954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죽산은 입후보조차 하지 못했다.
등록방해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산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제외한 야당세력의 창당운동인 '혁신대동운동'을 벌였고, 1955년 12월 진보당 창당준비위를 발족시킨다. 진보당은 강령에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제급의 전제를 반대하고 통일과업의 민주적 실천 등의 정치노선을 담았다. 1956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죽산은 민주당 신익희(申翼熙)후보의 갑작스런 서거에 따라 야당 단일후보로 나서게 됐다. 투표결과 이승만 504만표, 죽산 216만표였다. 훗날 이 선거는 극심한 개표부정속에서 치뤄졌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선거엔 졌으나 죽산은 확고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정권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간첩조작음모가 곳곳서 감지되면서, 진보당 간부들의 검거열풍이 이어졌다. '진보당사건'으로 죽산은 체포됐고 북과 내통했다는 양명산이란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운명은 더욱 가혹해 진다. “국시를 위반한 평화통일을 제창했으며, 양피고인을 통해 수시로 연락하면서 자금을 얻어 쓰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죽산에겐 사형이 구형됐다. 당시 사회 분위기나 모든 정황으로 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권부를 제외하고) 결과였다. 당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승만의 경찰이 조봉암의 목에 오랏줄을 매어 정적(政敵)을 말살했다”고 쓰기도 했다.
죽산은 아직도 사면되지 않은 상태다. 죽산을 생각하는 이들은 “정치·사회적으론 죽산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며 “그러나 정치권에선 여전히 부담스러운지 사면을 꺼리고 있는 눈치”라고 지적한다. '죽산 조봉암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주비위' 주비위원인 충북대 경제학과 조수종교수(59)는 “당시 법적제재절차나 법해석, 증거 및 상황의 채택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며 “재심을 요청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주비위는 탄원서를 내는 한편, 주비위를 승격하는 문제도 협의중이다. 40여년전 명망 높은 한 진보정치인이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강제된 힘에 의해 사라졌다. 그것이 명백한 조작이라면 또 하나의 굴절된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므로. /李旻鍾기자·minjong@kyeongin.com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3]죽산 조봉암(下)
입력 200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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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0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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