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석(雲石) 장면(張勉)박사(1899-1966) 역시 해방 후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정치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기구할 정도로 '가시밭길'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정치파트너에서 야당지도자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현대사 한 가운데서 몸부림친 운석은 '불운한 정치가'로 잘 알려져 있다. 4.19혁명의 과실을 지켜내지 못하고 군사정부에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타계한이후에도 '무능한 정치인'과 '민주주의원칙을 중시한 합리적 지도자'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장면박사는 세무공무원이었던 부친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시아 사이에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적선동에서 출생했지만 그의 집안은 곧바로 인천으로 옮겼다. 그래서 운석은 인천에서 성장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유복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06년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이 곳에서 운석은 천자문을 비롯해 동몽선습·소학·대학·통감 등 한학은 물론 신학문을 두루 배웠다. 박문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들어갔다. 이어 YMCA기독교 청년회관 영어학과에 진학, 3년간 공부한 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맨하턴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맨하턴대학과 시튼 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들 대학에서의 공부는 훗날 운석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는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이란 제하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대학생활에서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다. 일제 아래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첩경은 민간 교육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벌여나가야 하는 것임을 신념으로 갖게 됐다.” 이런 그의 신념대로 운석은 한국에 돌아 온 천주교 학교를 중심으로 20여년간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그러던 운석이 정치인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해방 이듬해 1946년 천주교 대표격으로 미군정청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에 참여하고 잇따라 입법의원으로 뽑히면서부터다. 특히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 대한민국 대표단으로 참가해 한국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한 그는 다음해 6.25 전쟁이 터지자 유엔군의 한국파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5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그러나 운석은 이 때부터 독재를 일삼으며 정적을 무참히 짓밟는 이대통령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결국 2년 뒤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그는 1955년 9월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항거해 신익희, 조병옥 박사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에 추대됐다. 힘겨운 야당생활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당시 자유당은 거창양민학살사건국민방위군사건 등 온갖 실정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야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1956년 운석은 신익희 대통령후보와 함께 부통령후보로 출마,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유명한 구호를 내걸고 선거전에 나섰다. 유세도중 신익희선생이 심장마비로 서거했지만 운석은 자유당 이기붕후보를 무려 20만표차 이상으로 따돌리며 부통령에 당선됐다. 이렇게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부통령에 선출됐는데도 자유당측은 그에게 심한 탄압을 가했다. 급기야 1957년 9월 29일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김상붕이란 청년에 의해 저격까지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이어 1960년 운석은 조병옥박사와 함께 민주당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이 선거에서 세불리를 감지한 자유당 정권은 사사오입이란 사상 초유의 '3.15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4.19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12년간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당은 자연스럽게 수권정당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민주당은 윤보선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총리지명을 둘러싸고 신·구파간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구파대표 김도연씨와 표대결을 벌여 운석이 근소한 차로 눌러 총리에 임명됐지만 조각과정에서 신·구파 갈등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내각 배분을 둘러싸고 서로 기득권을 주장하며 등을 돌린 것이다. 더구나 이 조각에는 친일파들이 상당수 기용됨으로써 4.19혁명으로 일궈낸 국민들의 열망을 저버린 채 결국 장면박사의 정치적 역할을 평가절하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윤보선·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은 당내 갈등과 보안법 개정안, 데모규제법 통과 등 국회에서 잇따라 반민주 악법을 통과시키면서 야당과 국민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혀 사회적 불안이 극도에 달했다. 마침내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의 과실을 지키지 못하고 군사정부에 정권을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