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군사독재의 막을 연 1961년 5월 16일. 제 2공화국 총리 장면은 서울 혜화동 깔멜수도원으로 도피했다. 그가 이 수도원에서 군사구테타를 피해 숨어지내던 운명의 40시간은 곧 역사의 반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긴박했던 그 당시를 운석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군인들을 피해 미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깔멜수도원으로 찾아가 친교가 있던 원장의 도움으로 숨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나약했던' 상황대처 탓에 많은 희생을 치르고 일궈낸 4.19 혁명의 열매를 고스란히 군사정부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국내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실업자가 250여만명에 달한 가운데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없는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결국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대통령은 하야했고,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윤보선·장면의 제 2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2공화국 정부는 조각을 둘러싸고 자기지분을 늘리기 위해 신·구파로 갈려 '집안싸움'을 벌였다. 더욱이 민주당에 참여했던 정치인 중 상당수가 친일행적을 갖고 있는 등 태생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운석의 비서관이었던 송원영 전의원은 “제2공화국 조각 때 14명의 국무위원중 최소한 7명은 일제시대 관료거나 이름난 친일파로 구성됐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이렇게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가 국민들이 기대하는 개혁을 수행할리 만무였다. 특히 장면정권은 11월 개헌을 통해 '반민주 행위자 공민원 제한 법안'과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 등 4개 특별법을 제정했으나 반민족행위자와 부정축재자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건국초기 반민특위가 친일파 처리에 실패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2공화국 정부는 출범 후 냉전체제 변화에 발맞춰 한국사회의 정치적 발전과 외교역량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웠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 비해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했고, UN외교 강화와 한·일관계 복원에 적극성을 보였다. 반면 야당과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민주 악법으로 불리던 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강행,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윤보선·장면 정부는 한국전쟁 후 피폐한 국가경제를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외국 차관을 도입하는 등 장단기 경제개발계획을 세웠으며, 이 계획은 5·16 군사쿠데타 직전에 거의 다 완료됐다. 또 급속한 환율인상과 미국의 원조 감소로 경제·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자 응급처방으로 1961년 3월부터 실업자 구제와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위해 국토개발사업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런 공과를 토대로 무능한 정부로만 인식되어 온 제2공화국과 장면에 대해 새롭게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9월부터는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운석 기념회'를 창립해 다양한 연구활동과 기념사업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운석 장면 전총리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고려대 조광교수는 “제2공화국의 무능이나 부패, 장면 개인의 우유부단함은 박정희 군사정부가 5.16 구테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며 “운석은 탁월한 종교·교육 운동가인 동시에 특출한 외교관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경희대 하동현 교수는 '장면의 정치 활동과 사상에 관한 연구'란 제하의 주제발표를 통해 운석을 높이 평가했다. “구데타를 초래한 무능한 정치가라는 결과론적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장면의 정치적 이상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는 다원화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주도형 경제건설, 관용과 대화의 정신, 합리적인 통일방향의 제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제고 등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아래서 실천을 하려고 애쓴 이상적인 정치가였다. 장면의 사상과 생애를 관통하는 기본 정신은 그리스도교적 정신의

현과 실천이었으며,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구현이라는 정치사상은 한국 민주주의 발달 과정에서 등대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석에 대한 시각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민족과 자유의 이상을 앞세운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아직도 4.19 혁명의 과실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운석의 정치적 역정은 좌절과 실패로 끝났으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실천의지는 오늘 우리 앞에 미완성의 숙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갖 힘을 쏟았던 장면의 인생역정은 곧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되새기게 하는 단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