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책은 쌓아두면 돌출부가 망가지니 꽂아서 보관하라….”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송암(松岩) 박두성(朴斗星)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다. 송암은 한글체계에 맞춘 점자 '훈맹정음'을 창안, 시각장애인들의 앞길을 밝혀주며 평생을 불행한 이들을 위해 살았다. 그는 점자를 연구하다 자신도 시력을 잃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점자책 보급에 헌신함으로써 오늘날 시각장애인들에게 '영원한 등불'로 추앙을 받고 있다.

송암은 1888년(고종 25년) 3월 16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포리 516번지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살 때 강화 보창학교에 입학해 4년간 신학문을 배웠으나 1901년 대흉년이 나자 가족들을 부양할 겸 신교육을 더 배우겠다는 열망을 안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거기서 잠시 점원생활을 하던 송암은 그러나 뜻을 살릴 수 없자 다시 강화로 돌아와 농사일을 했다. 귀국한 뒤 평소 그를 아끼던 보창학교 설립자 이동휘 선생이 서울 한성사범학교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한성사범을 나온 송암은 어의동 보통학교에서 8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그가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2년 일본이 유화정책의 하나로 제생원(濟生院:고아의 양육과 맹아 교육을 맡은 기관)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산하에 맹아부(盲兒部)를 둔 후 서울에 '한국관립맹아학원'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총독부는 교원 자격을 갖춘 송암을 적격자로 지명하고 어의동 보통학교에 재직중이던 그를 1913년 1월 6일자로 제생원 맹아부 근무를 발령했다. 처음 시각장애인들의 교육을 맡은 그는 교재도 없이 말로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맹아부에 건의, 일본에서 점자 인쇄기를 들여와 한국 최초의 점자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송암은 일인들이 만든 점자론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그 언어를 잘 보전하고 있는 한 그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눈을 잃었으나 우리말, 우리글까지 잃어선 안된다”고 가르쳤던 그는 일인들의 눈을 피해 한글점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글 점자 창안에 고심하던 박두성은 1918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ses Hall)의 부인 로제타 홀(Rosettar Hall)이 뉴욕 점자를 응용해 만든 '평양점자'를 활용, 이듬해 3월 천자문 점역(点譯)을 완성했다. 하지만 '평양점자' 역시 자음, 모음을 반 칸씩 띄어 써야하는 등 불편했다. 그래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해 12월 한글 자음 14자를 '3점 점자'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이어 1921년 모음 10자를 '2점 점자'로 바꿨다. 이것이 초기의 '3·2점자'다. '3·2점자'도 크게 발전한 것이지만 받침 사용에 불편이 따랐다. 결국 송암은 1923년 4월 제생원 졸업생 8명을 모아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 외국의 '6점 점자'체계를 응용해 한글을 6점화하는데 성공했다. 그 때 송암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연구를 하면서 눈을 혹사한 탓에 10여년 후 시력을 잃게 된다. 이런 악전고투 속에서도 1925년 한글점자를 완성한 그는 총독부에 진정, 한글점자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4일 마침내 한글 반포 8회갑(480주년)을 맞아 '훈맹정음'을 발표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송암은 1931년 4월 신약성서 점독을 위한 아연판 제작에 착수, 1년 5개월만에 88장에 이르는 마태복음 점역판을 완성, 대한성공회를 통해 점자성경을 발행했다. 이어 1935년 3월 22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1937년 인천영화소학교(현 영화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4년 동안 신약성경의 아연판 제작을 마무리했다. 그 후 해방될 때까지 '3·1운동 비사', '맹인 청년규약', '이광수 전집' 등 200여종의 점역서를 발간했다.

1945년 중구 율목동 25번지 본가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집에 '맹인도서 안내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점자책을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재를 털어 점역서적을 공급하다 보니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족들까지 모두 나서 종이를 구하러 다녔다. 헌 장부 용지를 얻으러 병원과 은행 등을 돌아니면서 갖은 고생을 했다는 게 가족들의 설명이다.

“윤택한 생활을 자랑으로 삼지 말고 늘 어려운 이웃들을 살피라는 게 아버님의 뜻이었습니다. 서울 서대문 제생원 맹아원 기숙사에서 시각장애인들과 친형제처럼 지냈지요. 그리고 자라선 시각장애인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아버지를 도와드렸어요. 아버님이 교직을 떠나신 이후에도 집에는 항상 시각장애인들로 붐볐습니다. 앞을 못보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처럼 지냈지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 정희씨(78)의 회고다.

송암은 1963년 8월 25일 일요일 낮 12시 15분 가족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65년 11월 4일 맹교육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