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신으로 조선의 넋과 아름다움에 영혼을 바친 미술사학자. 조선의 숨결을 쓰다듬어 가슴에 품었던 고미술 학계의 고독한 선구자···.”
인천이 낳은 한국 미술사학 및 미학의 태두(泰斗)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을 일컫는 표현이다. 오늘날 한국 미술사와 미학의 물줄기가 우현서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만큼, 그가 이룩한 학문은 높고도 깊다. 우현은 암울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아무도 눈길을 돌리지 않던 우리 미술사와 미학 분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의 전통을 살려 체계화한 유일한 학자였다. 우현은 특히 전국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아름다운 우리 문화의 숨결을 느끼려고 애썼다. 아마 일제라는 암담한 시대를 배경으로 그의 눈엔 고유의 전통미들이 더 애틋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우현은 40세의 나이로 개성 송도박물관 관사에서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짧은 생애 동안 무려 1백50여편에 이르는 방대한 연구논문을 남긴 학문적 업적은 후세에 길이 빛나고 있다.
우현은 1905년 2월 2일 인천부 용리(지금의 용현동)에서 태어나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학교)와 서울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국제대학(서울대학의 전신) 예과 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보성고보 시절 인천문화운동에 씨앗을 뿌린 '경인 기차통학생 친목회'의 문학활동에 참여해 '경인팔경', '해변의 살기' 등 인천을 소재로 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1927년 다시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1930년 3월 졸업과 함께 모교 연구실의 조수로 임명돼 3년동안 일했다. 자료수집 등을 통해 지식을 쌓고 기반을 닦은 그 때부터 우현은 학문연구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우현은 그 무렵 한국인 학술잡지인 신흥(新興)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세상에 공개했다.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 , '조선과 탑파 개설' , '고려의 불사(佛寺) 건축' 등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 논문은 우리 전통문화의 진수를 최초로 알린 미술사적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우현은 '조선 탑파 개설'을 통해 우리 문화를 멋대로 왜곡하려고 했던 일본의 학자들에게 쐐기를 박는 것은 물론 치명타를 안겨 주기도 했다.
이처럼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우현은 1933년 3월 초대 개성박물관장직을 맡게 됐다. 여기서 그의 학문적 깊이는 더해 간다. 우현은 박물관장으로 일하면서 1936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출강,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고려시대 유적이 산재된 개성은 물론이고 전국 곳곳의 유적지를 답사해 얻은 연구 결과물을 속속 내놓아 권위를 인정받았다. 아울러 탑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건축사, 공예사, 회화사, 조각사 분야에까지 학문영역 범위를 넓혀 나갔다. 이 때 펴낸 논문중 하나가 그 유명한 '송도의 고적'이다. 그리고 우현은 1944년 6월 2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개성박물관장 자리를 지키며 1백50편의 논문·연구발표 등을 통해 우리나라 고고학 분야와 미학 및 미술사 개척의 선구자로 우뚝 선 것이다. 우현이 해석한 한국미의 성격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으로 압축된다.
학계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고려청자' , '한국미술문화사 눈총' , '조선탑파 연구' , '한국미술문화사론' , '우리의 미술과 공예' , '조선화론 집성',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 등도 송도박물관장 시절 쏟아낸 작품이다. 그 가운데 1938년 고려시보(高麗時報)에 문무대왕의 해중릉을 발견하고 그 감회를 적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화려한 무덤 대신 화장하여 그 골회(骨恢)를 동해에 뿌려주면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왜(倭)를 막겠다”고 유언한 문무대왕의 고매한 정신을 알려 당시 조선인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이같은 선생의 정신이 이어져 1968년 마침내 문무대왕 수중릉을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1974년엔 이런 우현의 업적을 기려 문무대왕의 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과 인천 자유공원에 기념비와 추모비를 세우기도 했다. 자유공원 추모비는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우현은 제자들을 키우는데도 열성적이었다. 그는 개성박물관장 시절 만난 황수영, 진흥섭, 최순우 등 이른바 '개성 3걸'에게 자신의 학문을 속속들이 깊이있게 가르쳤다. 우현의 영향으로 이들은 훗날 한국미술사학회를 발족하고, 우리 미술사 학계를 이끌어 가는 거목으로 자랐다. 제자들은 1980년 선생의 뜻을 모아 우현 미술상을 제정, 매년 미술사 분야에서 업적이 뛰어난 이들에게 시상하고 있다. 아울러 새얼문화재단(이사장·지용택)에선 1992년 9월 2일 '제 1회 새얼문화 대상'의 수상자로 우현 선생을 선정, 인천시립박물관에 그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우현의 '수제자'로 꼽혔던 황수영, 진홍섭의 도움으로 '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7]우현 고유섭
입력 200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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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1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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