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에겐 가난한 것이 자랑이다. 비굴하지 않고, 천만인 앞에 나가서 오직 정의를 높이고, 부정을 격멸하고, 현실을 폭로하고, 선악을 구분·비판해 한자루의 붓을 유일한 무기삼아 사회와 인생을 명랑화시키는데 사력을 다하는 것이 신문기자다. 인천지역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꼽히는 산재(汕哉) 고일(高逸)(1903~1975)선생은 기자의 사명을 이같이 정의했다.
광무 7년(1903년) 음력 5월 6일 측량사였던 부친 고영희씨의 장남으로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그는 4개월 뒤 강보에 싸인 채 경인선에 실려 '개화의 고동소리' 요란하던 인천으로 이주했다. 본래 호적명은 희선(羲璇)이었으나 후일 언론인과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逸이란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1915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사숙에서 한문을 수업하던 그는 1922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양정재학시절엔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곽상훈 등과 함께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조직, 모임의 총무와 문예부장을 맡았다. 아울러 이 모임을 중심으로 '야구인천'의 상징이던 한용단의 창단(단장·곽상훈)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후일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당시 초인관(楚人冠)의 '신문지학(新聞之學)'을 열독하고 나서 등사판으로 간행된 학생잡지를 편집하면서부터다. 신교육령에 의해 양정고보 졸업 1년만인 1923년 전학과를 다시 졸업한 그는 당초 모교 교비생으로 일본에 유학하려 했으나 재단 사정으로 중단되자 연천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인교장의 황국신민화 강요에 항거, 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한 뒤 반년만에 사퇴했다.
연천공립보통학교 교원시절 일화에서 그의 열정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거기서 그는 틈틈이 부녀자학생들을 상대로 레미제라블 등 동서고금의 문학과 역사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그는 이를 위해 매일 숙직을 자청하는 열의를 보였고, 하루 70전의 숙직료를 받아 학생들을 '대접'했다. 그런데 하루는 대여섯명과 밤늦은 시각까지 교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난 다음날 공교롭게도 학교 금고에 들어있던 월사금이 없어졌고, 교장은 경찰에 신고해 학생들을 모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교장을 찾아가 만일 학생들이 돈을 훔쳐갔다면 교육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책무인데 당신은 교육자의 자격이 없다며 뺨을 후려갈겼다고 한다. 물론 이로 인해 그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고향에 돌아온 후 그의 신문기자 생활은 시작됐다.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잠시 있었던 그는 1924년 3월 31일 육당 최남선 등이 창간한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에서 이 때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했다. 소년·청년·노동·사상운동에 선봉이 되었고, 무관의 제왕으로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기개와 의협은 일생을 두고도 기억할 수 있다. 유치장 출입은 다반사였고, 치안유지법으로 약 4년간 영어의 신세도 졌다.
하지만 그는 만보산사건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통한 재인화교와의 교섭과 친화, 신간회운동 등을 통한 민족 단일당운동 등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32년 7월 북만주로 떠나 6년여 동안 망명생활을 한다. 이어 일본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1938년 귀국한 뒤 인천부청 임시사원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그는 인천시립도서관장, 인천신문 고문, 대중일보 편집국장, 조선통신(이후 고려-한국통신으로 변경됨) 인천지국 편집장, 시사·합동지사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진 뒤엔 대한신문(전시판) 편집국장을 맡았고,전후 1954년 창간한 '주간인천' 주필로 있으면서 '인천석금'에 1년간 연재한 원고를 모아 1955년 4월 창간 1주년기념으로 단행본을 내놓았다.
그는 1956년 인천시편찬위원회 전임위원, 1960년 인천문화회관장, 인천신문 논설집필을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서 지역발전을 위해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64년 12월엔 경기도문화상 언론부문 제1회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신문기자의 열정으로 지역언론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행동양식은 신문기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고 평가한다.
고일선생은 70년대 인천지역 언론사가 해방직후에 비해 52배, 기자가 100배 증가한데 놀라워하면서 한탄을 하기도 했다. 이 많은 숫자가 과연 저널리스트로서,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있는 인재로 모인 것인가? 소수의 양심파를 제외하고 다수는 세인의 지탄대상이 되고 있다니 자학의 비탄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운산, 고하, 몽양 등이 신문관계자였으며 처칠·케네디도 신문기자였던 것을 상기할 때 점심값·택시값·한잔술에 지조를 파는 따위는 기자란 이름을 가질 수 단연 없다. 기자를 욕되게 하는 것이 기자라는데 더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8]산재(汕哉) 고일(高逸)선생
"빈한이 사무쳐도 부정을 격멸하라"
참언론인 향토사에 큰 족적
입력 2000-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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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6-2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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