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 시절 어느 날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순수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한용단'(韓勇團)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미신'(米信)팀의 경기였다. 민족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였던 셈. 그런데 경기가 진행되던 중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한 한국인 청년과 당시 인천경찰서 검도사범이던 '청전'(淸田)이란 일본인 사이에 판정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편파판정으로 우승을 놓쳤다고 흥분한 한용단 응원단원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충돌사고로 이어졌고, 이 사건은 한용단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일본인 검도사범과 판정시비를 벌인 한국인 청년이 바로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 1896~1980)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한국의 간디'로 통했던 인물. 삼연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마친 뒤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면서 형이 살고 있는 인천으로 이주했다. 청년 시절 인천에서 그의 애국·애족적 활동은 매우 왕성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한용단 활동이었다. 삼연은 한용단의 단장을 맡아 야구단 결성에 산파역을 했으며, 아울러 후원자로서 온갖 정성을 쏟았다. 한용단은 성격상 항일학생운동 단체로서 스포츠를 통해 애국 투지를 불태웠던 인천 야구의 원조로 평가받는다. 한용단이 해체된 뒤 1926년에 고려야구단을 결성했는데, 이로써 한용단으로 시작한 인천 청년야구는 인천상우회(仁川商友會)와 고려야구단으로 이어지며 명맥을 유지했다.

삼연은 또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이끌기도 했다. 이 모임은 한용단과 함께 당시 인천지역 학생 단체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단체로 꼽힌다. 삼연이 초대회장을 맡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원들을 꼽아보면 지나간 인천의 명사록을 방불케 한다. 인천의 원로 신태범박사가 최근 펴낸 '개항후의 인천풍경'(인천 향토사 연구회 발행)에 따르면 법무장관을 지낸 조진만(법학전문),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경성제대 미학과), 공보처장을 지낸 만홍기(연희전문), 치과병원 원장 임영균(치과전문) 등 널리 알려진 인천의 명사들이 초기의 기차통학생 회원들이었다.

한용단은 바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원 중에서 배재·중앙·휘문 등 서울의 각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삼연은 항일운동에 뛰어들 당시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 하면서 수시로 옥고를 치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1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중 인천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 8개월간 옥고를 치른 것을 비롯해 심지어 중구 신포시장에서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노점상을 괴롭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일본인 순사를 폭행하다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삼연은 3·1 운동 당시 항일운동에 가담한 이래 1923년엔 조선소년단 제4호대장으로 활동했고, 1924년 동경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조선인 학살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어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 하상훈·서병훈·이범진·최선경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이 해 중국 망명길에 올라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로 일했다. 1928년엔 '만보산(萬寶山)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보호연맹인천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또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객원기자로 활동한 것을 인연으로 광복 이후 동아일보 인천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삼연은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1949년엔 반민족행위처벌재판소 검찰차장으로 선임되고, 이듬해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된 이래 제5대까지 국회의원에 뽑힌 그는 국회전원위원장, 국회부의장, 민주당최고위원,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4·19혁명으로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는 5월 17일부터 22일까지 7일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삼연이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이유는 성격이 강직하고 정치적 소신이 확실했기 때문이란 게 그를 아는 이들의 얘기다. 1960년대 초 그의 비서관으로 활동한 조병만씨(76·인천시 동구 송림동)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삼연을 기억한다. 조씨에 따르면 삼연은 선거운동을 할 당시 “야당의원으로서 이루지 못할 공약은 하지 않겠다”며 아예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하면, 인천이 정치적 연고지라 해서 인천 사람 어느 누구에게 혜택을 주는 일이 전혀 없었다. 특히 지방의 문제는 지방의원들에게 맡기고 국회의원은 국정에 전념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이루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 국가에서 추진한 일도 자신의 공적으로 홍보하는 요즘 정치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삼연은 보여줬다”며 “특히 5·16 군사 구테타 후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 수시로 박대통령에게 '귀가 멀면 나라가 망한다'는 직언을 서슴치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