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을 활성화해야 사회가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게 됩니다….”
이달성(81) 인천시체육회 참여위원의 '스포츠 찬양론'이다. 15일 '체육의 날'을 맞아 인천·경기 체육의 '산 증인'으로 통하는 이 위원을 만났다.
그는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와 분리, 새롭게 조직된 인천시체육회의 산파 노릇을 하고 초대 인천시체육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리고 1년 뒤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그만둔 이후 줄곧 원로들의 모임인 참여위원으로서 자문 일을 맡고 있다.
“60~70년대 경기도선수단의 70% 정도가 인천 출신 선수들로 구성될 만큼 인천의 선수층이 두터웠습니다. 사실상 인천이 경기체육을 이끌었던 셈이지요.”
그는 중학교 체육교사 시절인 1965년 당시 경기도육상연맹의 전무이사를 겸임하면서 경기육상 사상 처음으로 전국체육대회 종합우승을 견인했다. 78년엔 아예 교사를 그만두고 경기도체육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는 30년 넘게 교직에 있었지만 퇴직연금제가 시작됐던 때여서 연금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사무국장 시절 경기 육상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그가 운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故) 손기정 옹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했던 1936년. 중국 북경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중국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이 마라톤을 잘 하니 한 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나서였다고 한다.
그 후 1942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 전국체육대회'에 중국 거류민 대표로 참가했을 정도로 마라톤 실력을 인정받았다.
중국에서 체육대학을 졸업한 그는 해방과 함께 귀국, 서울의 중학교에서 체육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1947년 10월, 6년제이던 인천 동산중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했다. 2년 뒤엔 전국 중학교 육상대회 400m, 800m, 5천m 등 중·장거리 우승선수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제82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요즘 그는 나이도 잊은 채 개최지인 충남 전역을 누비며 각 종목별 인천 선수단을 격려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 올 체전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인천 체육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은 선수가 없어 출전하지 못하는 개별 종목이 100여 개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선수층이 얇다는 얘기지요. 관계기관에서 더 많은 지원과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인천체육의 재정 자립도가 16개 시·도 중 10위권 밖에 있는 실정”이라며 빈약한 재정지원 문제를 또다른 성적부진의 이유로 꼽고 있다.
그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주위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클 수 있다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운동을 그만둬야 했다. 그래서 운동을 계속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다는 이 위원은 “스포츠 역시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