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은 소래산에서 약 6㎞정도 떨어져 있는데 높이 201m로 인천에선 비교적 큰 산이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조차도 만수산을 아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저 마을 뒷산 정도로 알고 있을 뿐 만수산이란 이름엔 고개를 갸우뚱한다.
산 동쪽엔 조선 인조(1642년)때 중국 사신이 서울(한양)에 특사로 왔다가 궁중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공주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는 비루고개가 당시의 애잔함을 지닌 채 외롭게 서 있다.
서쪽엔 새말, 구룡골, 산밑말, 담댕이말, 장승배기, 새골, 돌골, 쇠판 등으로 불렸던 만수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남쪽엔 유난히 장수하는 노인이 많이 살았다는 장수동이, 북쪽엔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향취정으로 불렀다가 해방 후 동명을 개정한 일신동이 자리잡고 있다.
만수산이란 이름은 산 아래 마을이 장수촌이고 이 곳 주민들의 수명이 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산은 또 큰 산이라 해서 대산(大山)이라고도 부른다. 산 밑에 100세 노인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만수산을 가려면 일단 수현마을을 거쳐야 하는데, 산에 오르는 길을 찾기 어렵다. 도로를 따라 인터체인지로 올라가면서 산의 초입을 찾느라 여기저기 살폈으나 온통 군부대 담장이 막고 있다. 다시 수현마을로 내려가 군부대 정문에서 초병에게 “만수산이 어디고 오를 수 있는 방법은 뭐냐?”고 물었지만 잘 모른다.
“만수산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는 주민들의 말에 실망하면서도 또다시 발길을 재촉해 만월산 터널공사가 한창인 경찰학교 뒤편에서 무작정 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기록에서 본 만수산의 위치를 설명하며 '이번만은…'하는 기대를 했으나 '답'을 주는 이가 없다.
이름모를 산사면에 군부대에서 설치한 '출입금지'라는 경고판이 눈에 거슬린다. 30여분 올랐을까. 널찍한 산사면 일대 공동묘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조망이 매우 빼어나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찾는듯 운동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간간이 튼실한 다리를 내보이며 가파른 산등성이를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는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만수산 산행은 결국 헛걸음으로 끝났다. 아무리 물어도 아는 이가 없으니….
'2차 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야간 산행을. 산행의 묘미는 야간에 있다는 한 '산악인'의 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탕친 경험 때문에 자료란 자료는 모조리 뒤적여 위치를 파악하고 차분히 오를 셈이었다.
손전등을 갖고 만수동 벽산아파트 후문까지 갔다. '이 시간에 웬 산이냐'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택시기사를 뒤로 하고 곧장 산으로 올랐다. 전날 내린 비 탓인지 길이 미끌미끌하다. 산행 처음부터 급경사를 택해 나무계단을 따라 10여분 오르자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산등성이에 오르니 시원한 봄바람이 뺨을 스치며 어느새 땀을 삼켜버린다.
산등성이를 따라 발길을 재촉하자 군데군데 소원을 빌며 하나씩 쌓았을 돌탑이 눈길을 붙잡는다. 인적없는 산길을 혼자 걷는 묘미가 바로 이런 것일까? 시선을 옮길 때마다 파노라마처럼 인천의 야경이 펼쳐진다. 문득 혼자 감상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쌓였던 온갖 상념과 스트레스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50여분을 오르자 산 정상이 마중했다. 헬기 한 대 앉을 정도의 평지였다.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온갖 시름을 털어버렸다. 산높이와 정상에 오른 기쁨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만수산 자체의 경관은 명산에 견줄 바 아니다. 그래서 아는 이가 별로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수산을 올라보면 산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속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낼 수 있는 공간이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수산은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아 부담없고, 산행 시간도 1시간이면 충분해 남녀노소 누구나 포용하는 넉넉함을 지녔다. 이 같은 넉넉함이 결국 이 산의 이름을 만수산으로 짓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수산 인근엔 칠성, 바가지, 송수천 약수터가 있어 약수터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