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졸업 14년만에 대입전문학원 종합반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정경옥씨가 교실 책상에서 밝게 웃고 있다./임순석·sseok@kyeongin.com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한 여성 정경옥(32)씨의 '내 인생 찾기'는 을유년 새해 첫달 4일부터가 진짜 출발점이다. 이날 오전 9시 인천시 남구 주안동 J학원 종합반 5층 교실. 책상에 책과 필기도구를 펼쳐놓고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초록색 칠판을 응시하자 일순간 행복감이 몰려온다. 고등학교 졸업 뒤 꼬박 14년만에 교실에서 수업받는 학생 신분으로 돌아온 것이다.

머릿속을 스치는 지난 세월이 마치 꿈만 같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과 훼치는 소리처럼 올 한해 대학 수능시험 준비에 열정을 다 쏟으리라….'

경옥씨는 충남 서산에서 나서 자랐다. 고교 시절까지 반에서 5등 안에 들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심하게 병들고 생계수단이 막막해 졸업하자마자 외갓집이 있는 인천으로 와야 했다.

당시는 부모님의 병원비 마련이 발등의 불이었고 가족의 생계비 마련도 급했다. 지금은 어엿한 중견사회인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었던 오빠(35) 그리고 여동생(31), 남동생 둘(29, 26)을 모두 합해 일곱 식구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숙제가 경옥씨 어깨에 지어졌던 것이다.

보험회사 영업사원, 다이어트스쿨 영업사원, 회사 경리…. 가족과 자신의 삶을 위해 경옥씨는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친구들은 모두 결혼했음직한 28살 나이가 됐을 즈음 경옥씨는 인천에 자그마한 꽃가게를 내고 직접 운영했다.

3년 뒤에는 옷가게로 업종을 바꿔 자영업을 경험하기도 했다. 꽃다운 20대를 억척같이 살아 온 경옥씨의 간절한 효성에도 불구, 부모님의 병환은 갈수록 깊어 속상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결코 부모님이나 가정환경을 탓해 본 적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경옥씨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매달 2권 이상을 숙독하면서 자신을 담금질해 왔다.

형제자매도 모두 번듯하게 성장했다. “이제야말로 진짜 내 인생을 찾아 여행을 떠날 때라고 생각했어요. 그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몇해동안 준비도 해 왔고요.”

경옥씨는 지난해말 옷가게를 과감히 정리하고 잠잘 곳도 학원 근처로 옮겼다.

첫 결승점은 2006학년도 대입 수능시험, 따내야 할 목표는 수의학과나 약학과 입학.

“학원 종합반 등록을 마치고 나서 오랜만에 '나의 라임오렌지나무(J.M. 바스콘셀로스 지음)'와 삼국지 10권(이문열 편역)'을 읽으면서 제2의 인생을 출발하는 각오를 다졌어요.”

남동구 구월동 P외국어학원에도 새해를 맞아 자신을 계발하기 위해 새벽반과 심야반 외국어 강의를 자청한 직장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날 오후 8시 부평구 부평동 제일요리학원에서는 IMF 직후 부도를 내 수형생활을 하다 출소한 30~40대 남성가장 3명이 조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이론교육과 실습에 혼신을 쏟고 있었다. 유재경 제일요리학원장은 “역경 속에서도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절망 대신 희망을 희구한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