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민 등은 22일 “타 지역은 자연사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과 행정력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불구, 강화군과 인천시는 손안에 있는 세계적인 희귀물들을 관리도 못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강화은암자연사박물관(관장·이종옥)은 지난 2001년 7월 송해면 양오리 소재 폐교 300여평에 문을 열고 멸종 동물박제를 비롯한 천연기념물 등 희귀자료 20만여점 가운데 2천500여점을 전시해 왔다.
강화은암자연사박물관 이종옥 관장은 지난 18일 경기도 양주시 임충빈 시장과 자연사박물관 건립협약 체결식을 가졌다. 양주시는 박물관 건립은 양주시가, 유물비용 투자는 은암박물관측이 각각 부담하기로 했다.
은암자연사박물관은 세계에서 3개 밖에 없는 희귀한 조개 중 1개를 소장하고 있다. 희귀 조개는 1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도쿄박물관이 보관하다 미국의 폭격으로 사라졌으며 1개는 대만이 보유하고 있다.
또 전혀 가공하지 않은 자연동, 자연금, 천연기념물 등 귀중품들을 갖고 있으나 박물관이 비좁아 아직도 필리핀, 몽골 등지의 희귀자료들은 전시조차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이 관장은 “당초 강화군이 희귀자료들을 옮겨올 당시부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은 옮겨온 후에도 나몰라라 식이었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하점면 소재 강후초등학교 부지 1만3천여㎡, 건물면적 1천300㎡에 박물관을 세우려했으나 강화군측이 임대계약 등을 잘못해 결국 지금의 비좁은 곳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특히 장소문제로 지연되면서 자식처럼 애지중지 관리하던 대형 아나콘다, 도마뱀 등 살아있는 파충류 등이 얼어 죽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그후에도 군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관장은 박제·표본의 손상이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항온항습장치가 갖춰진 수장고라도 지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에 은암박물관이 박물관이 아닌 과학관으로 등록되는 바람에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예산지원의 길이 막혀 버렸다. 과학관으로 등록된 후에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었지만 담당 공무원들의 인식부족으로 예산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왔다.
이 같은 결과가 이어지면서 이 관장의 사재는 바닥이 나고 자녀들의 재산까지 털어 지난 겨울에도 화목보일러를 설치하는 등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이 관장은 결국 비전이 없다고 판단해 양주시와의 이전 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강화군의 한 관계자는 “강화 고인돌 광장 인근에 1만여평의 부지를 조성하고 은암자연사박물관을 이전하기 위해 올해 3천만원을 투입 타당성 검토를 완료하고 내년도에는 부지를 매입, 공사에 착수하기 위해 준비중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관장측은 양주시와의 협약체결이 이루어진 이상 양측의 유치 태도여하에 따라 전시물을 배분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천시·강화군, 지원 관리 '무신경'…"배신감 느꼈다"
“한국가요사박물관을 타 지역에 빼앗긴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인천의 자랑이던 은암자연사박물관 마저 빼앗겨야 합니까.”
생태계 희귀자료의 보고(寶庫)로 평가받던 은암자연사박물관이 경기도 양주로 가게됐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시민들은 허탈함을 넘어 분노에 찬 표정들이었다. 우리나라 가요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인천 한국가요사박물관을 타 지역에 빼앗겼고, 야구박물관 유치에도 실패하는 등 인천의 문화정책 부재를 지켜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암자연사박물관이 타 지역으로 이전하게 된 것은 인천시와 강화군의 잘못된 문화행정의 합작품이라할 수 있다. 사립박물관으로 지어진 은암자연사박물관은 개관 당시부터 자료보호 등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같은 상황은 경인일보 보도(2001년 11월 10·15·17일, 1·3면)를 통해 상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은암자연사박물관은 이종옥 관장이 40여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모은 어·패류, 희귀 동·식물화석, 조류 등 15만여점으로 지난 97년 6월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에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로 처음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비록 개인 소유이지만 우리나라 자연사박물관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전국의 지자체들은 이 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지자체마다 지역구 국회의원, 유지 등을 동원하며 각종 명분을 내세워 최적지임을 자처하고 나설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강화군민증까지 만들어 주는 등 '인간적'으로 접근했던 강화에 둥지를 틀게 됐다.
이 관장은 하지만 개관 직후부터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