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반대운동 등 일제에 항거한 고(故) 송재필 선생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15일 인천·경기지역에선 유일하게 독립운동 포상자로 선정,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상했다.
부인 이숙형(81·인천시 부평구 청천동) 여사는 “10년간의 노력끝에 결실을 맺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은 그리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옥중 고초에 대해 술이라도 한 잔하면 할법 한데 말을 무척 아꼈습니다. 아마 당신 때문에 옥중에서 숨진 친구 생각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1949년 봄 송 선생과 100년 가약을 맺은 이 여사는 “고문 탓인지 남편은 늘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며 “어느 날 아침 밥상을 준비하는데 '여보'소리가 나 방에 가보니 쓰러졌다”고 한다. 1968년 9월 송 선생이 47살이던 해였다.
송 선생은 1939년 모교인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졸업생을 중심으로 오륜조(五輪組)를 조직, 창씨개명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일본 명치대학에서 유학 중인 지난 1943년 7월 일제의 학병모집에 반대, 결의문을 작성하고 인천 상업학교 졸업생들에게 전달하려다 충북 영동경찰서에 체포됐고 1944년 6월 대전형무소로 송치, 옥고를 치렀다.
“당시 남편과 함께 귀국하던 24명의 친구들이 영동경찰서에 붙잡혔다고 하더군요. 온갖 고문에 결국 4명의 친구가 죽었어요. 남편은 주범으로 3년간 독방생활을 했죠.” 이 여사는 “졸업장도 감옥에서 시아버지로 부터 받았다”며 “해방 2달여 앞두고 형무소에서 풀려 났으나 고문에 못이겨 거의 죽어서 실려 나왔다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감옥에서 승진을 앞둔 간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며 “일본이 망한 뒤에는 경찰이나 옛 간수들이 집에 찾아와 인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법학을 전공한 송 선생은 해방 뒤 관직에 오를 기회도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잠시 모교(인천상업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대부분 책을 읽는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더 큰 고통을 호소했다는 송 선생은 생전에 억울하게 죽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6남매의 생계는 이 여사의 몫이었다. “지금은 모두 성장해 사회구성원으로 제 몫을 하고 있지만 당시는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먼저 세상을 뜬 남편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여사는 “10년전 우연한 계기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번번이 서류미비로 탈락했었다”며 “남편이 독립유공자로, 아니 남편의 명예를 되살리는데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조그마한 빌라에서 혼자 사는 이 여사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과거 목숨을 버려가며 애국했던 이들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한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