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11시 30분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선착장. 날이 흐리진 않았지만 옅게 낀 해무 사이로 교동도가 손에 잡힐듯 가깝게 다가왔다. 이 선착장에서 교동도까진 직선거리로 불과 3.2㎞. 만조땐 15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이 바로 교동도이다.

강화도 서북부에 위치한 동서 길이 10㎞에 남북간 6㎞인 교동도의 북부 해안선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에 해당한다. 남방한계선에 걸려있는 민통선 지역이라 수도권에서 가깝지만 외면받았던 섬이다. 교동도에서 북녘 땅인 황해도 연백평야는 강화도 만큼이나 가깝다. 6·25 전쟁 당시 교동도가 대북 첩보활동의 최일선이었던 이유이다. 당시 이 섬엔 군번도 계급도 없이 북에 침투해 첩보활동을 펼쳤던 흔히 '켈로부대'라고 알려진 'KLO(Korea Liason Office)'가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난지 이날로 꼭 56년. 당시 켈로부대에서 활동했던 젊은이들은 어느덧 나이 80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강화에 사는 6·25참전 KLO동지회 유종렬(79) 회장도 북에 침투해 공작을 펼쳤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돼버렸다. 유 회장은 지난 1951년 교동에 켈로부대가 생겼을 때부터 1954년 4월 정식으로 해체될 때까지 남북을 넘나들며 첩보활동을 벌였다.

그는 “켈로는 지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철군한 미 극동사령부가 남겨놓은 비정규 첩보조직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적진을 교란하는게 주임무였다”며 “나는 6개월 정도 북에 침투해 지하에서 활동하다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지만 친동생은 공산군에 붙잡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끝을 흐렸다.

6·25참전 KLO동지회에 따르면 교동의 KLO는 유격대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극동사령부 직할 첩보부대였다. 연인원 약 400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중 200여명이 북파됐다. 추정되는 미귀환자는 약 60명이다. 지난 1990년초 KLO부대 관련 자료를 만든 특수전사령부는 켈로를 '음에서 시작돼 음으로 사라진 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현재 교동도 지석리와 삼선리 경계에서 부대가 있었던 흔적은 세월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렸다. 대신 무성하게 자란 수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6·25참전 KLO동지회 박준천(72) 총무는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는걸 알리기 위해 부대자리에 비석이라도 하나 세우는 게 소망”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