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의 리빙스턴은 1873년 열병에 시달리다가 아프리카 방궤울루 호수 부근에서 죽었다.

그는 암흑의 대륙인 아프리카와 관계를 맺고, 인도주의 입장에서 원주민의 구제를 생각했으며, 그 사명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리빙스턴이 의료 전도사가 되어 아프리카 남부로 떠난 건 1841년이었다.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를 쓴 것은 느가미 호수를 탐색하고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서였다.

다시 6년 동안 탐험을 하고 귀국해서 「잠베지 강과 그 지류 탐험기」를 썼다. 그는 1866년 또다시 탐험길에 나섰으나 소식이 없었다.

그가 미국의 탐험가 스탠리 일행에게 탕가니카 호반 우지지 부근에서 발견된 것은 떠난지 5년 뒤였다.

발견 당시의 리빙스턴은 이미 뼈가 드러날 정도로 병들고 늙은 백인이 되어 있었다. 스탠리가 가까이 가서 물었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닙니까?』 병든 백인은 누운 채 손을 뒤스럭거렸다. 말할 기운이 없어 손으로 대답한 것이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닙니까?(Dr. Livingstone, I presume?)』라는 말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뜻하지 않게 오래간만에 만났거나, 오랫동안 찾던 사람을 갑자기 만났을 때 쓰인다.

우리의 속된 표현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군」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지만, 품위를 갖춘 말이다.

 남·북한 관계자가 그동안 베이징에서 물밑 접촉을 여러 차례 한 모양이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3일 북측과 비료 지원의 대가로 최소한 1천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도록 합의했다는 것이다.

비원의 「가족 상봉」이 무엇을 줌으로써 돌아오는 「대가」라는 게 어쩐지 씁쓸하지만, 어쨌든 남들이 하는 인도주의의 봄비가 이 땅에도 내렸으면 싶다.

이산 가족이 만나 스탠리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죽지 않고 살았었구나!』하고 외치는 기회가 오면 오죽이나 좋을까.

/Shinsm@kyeou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