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 인권 박물관은 며칠 전 가로 12m, 세로 45Cm 크기의 대형 그림 한 점을 공개했다. 관동 대지진 때 일본 경찰과 자경단이 저고리 차림의 조선인들을 대나무창 등으로 살해하는 장면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일본의 화가 가야하라 하쿠도가 관동 대지진 이듬해 그린 것이다.

1923년 9월 1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훤해지던 오전 11시 58분, 별안간 미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사가미 만. 드디어 진도 7.9의 강진이 내습했다. 도쿄의 시가지는 80%가 파괴되었으며 가나가와, 야마나시, 지바, 이바라키, 사이타마, 시즈오카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재난으로 11만2천6백19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5만6천1백41채의 가옥이 불타거나 무너졌다. 이같은 혼란 속에서『불은 조선인들이 낸 것이다』『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내습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뒤이어 군대가 움직였다. 기병대와 특전대 등 5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주민들은 마을마다 자경단을 만들었다.

경찰로부터『조선인은 죽여도 무방하다』는 지시를 받은 자경단은 경찰과 합세해서 낫과 죽창, 칼을 들고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살상했다.

조선 여성들을 강간하고 사지를 찢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피해 상황을 조사조차 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보도를 통제했다.

「독립신문」특파원의 현지 보도에 의하면 학살된 조선인은 모두 6천6백61명에 달한다.

일본은 1차대전 후에 밀어닥친 공황과 파병했던 시베리아 간섭군의 참패, 조선의 반일운동 격화, 활발한 노동운동 등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인을 빙자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의도적으로 정부가「관동 대학살」을 주도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한국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정권 다툼이 더 급해서일까. 오히려 일본의 인권 단체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Shins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