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때엔 오늘날과 같이「낙하산 인사」라는 게 없었다. 그러므로 능력을 갖춘 사람도 품계를 건너뛰진 못했다.

임금도 정해진 품계를 무시하지 않았다. 정승을 뽑는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승 3명 가운데 한 자리가 비었을 경우 두 정승이 후보를 3배수로 추천하고, 임금은 그 가운데서 한 명을 골라 낙점했다.

3배수 추천을「삼망(三望)」, 정승을 뽑는 일을「복상(卜相)」이라고 했다. 임금은 간혹 추천된 3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추천하도록 명했다.

그것을「가복(加卜)」이라고 했다. 숙종은 재위 13년 되던 해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우의정 이단하(李端夏)에게 몇 차례 가복을 명한 적이 있으며, 결국 조사석(趙師錫)을 낙점했다. 복상이 제도화된 것은 중종 때의 일이었다.

 다른 관리들의 인사는 비변사에서 담당했다. 비변사는 세 정승과 육조 판서, 장군들이 모인 문무 합좌기관이었다. 관리를 뽑을 때엔 인사 실무 담당자인 낭청(郞廳)이 정승을 비롯한 비변사 구성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각자에게 3배수로 추천을 받았다.

추천된 사람의 명단을「천망단자(薦望單子)」라고 했다. 임금은 후보 가운데 지지율이 높은 사람에게 낙점을 했으며, 신하들의 의견을 믿고 낙점한 비율은 80%였다.

조선의 법전인〈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관직은 모두 5천6백5직이었다. 세종 때의 인구가 6백50여만명, 숙종 때는 1천6백여만명인 점에 비하면 소수의 관리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 임용은 오늘에 비해 의견 수렴 과정을 두루 거치는 등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절차를 밟은 셈이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온 때문인지「언론대책 문건」으로 시끄럽던 국회는「색깔」문제로 옮겨져「파행」의 파고는 다른 때보다 몹시 높다.

여야의 싸움은 가히 이전투구의 모양새이고, 민생 문제는 간 곳이 없다. 그래서일까. 입동(立冬)을 맞으면서 올 겨울은 더 움츠려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날은 군주주의 시대가 아닌 모름지기 민주 사회다. 국민들의 손으로 낙점할 날도 멀지 않은 것같다.

 辛 世 默 〈주필〉